감천문화마을에서 만난 작은 기적들
부산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2박 3일의 여행 중 가장 설레는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미리 짜놓은 완벽한 일정표를 받아든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복받은 엄마'가 되었다. 때로는 아이들이 여행의 주인이 되어주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이다.
"오늘은 감천문화마을을 오전에 방문하고요, 오후에는 신세계 백화점 센텀시티에 있는 스파랜드에서 휴식을 취할 거예요. 그리고 저녁에는 부산의 유명한 전망대에 올라가서 야경을 감상할 예정입니다. 부산에 오면 꼭 가봐야 하는 코스래요."
둘째 아들의 또렷한 목소리에 오늘 하루가 얼마나 알찰지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푸짐한 토스트 오믈렛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채운 후, 둘째 아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운전 솜씨 덕분에 우리는 어느새 감천문화마을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피부를 찌르듯 내리쬐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감천마을은 벌써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연약한 우리 피부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햇빛이었다. 조금 비싸더라도 양산 하나 정도는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양산을 구입한 후, 본격적인 감천마을 탐험에 나섰다.
여행을 무척 사랑하고 여행에 진심인 둘째 아들은 거금을 들여 산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메고, 감천마을 방문 투어 스탬프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투어 지도를 펼쳐 들었다. 지도 속 가이드라인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꼭 방문해야 할 명소들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열정으로 감천마을 구석구석을 누비기 시작했다.
특히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조형물이 있는 전망대에서는 그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긴 줄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인증 사진을 찍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사랑스러웠는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걸음을 사로잡는 아기자기한 공방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아들에게는 방문한 곳의 엽서를 모으는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 가는 곳마다 그곳을 상징하는 엽서를 하나씩 정성스럽게 골라 샀다.
뜨거운 햇빛 때문에 등줄기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목도 바싹바싹 말라갔지만,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들에 대한 아들의 강한 열망 덕분에 우리는 정말 이곳저곳 샅샅이 감천문화마을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을 곳곳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간간이 유럽인들과 동남아시아 관광객들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더욱 자랑스러웠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점점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 같아서, 해외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감격스러웠다.
아들의 굳은 의지로 우리는 관광객들을 위한 작은 이벤트 같은 것을 달성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이벤트인지, 아니면 감천문화마을 홍보 활동인지는 애매했지만 말이다.
아들은 스탬프를 찍어야 하는 곳이 바로 감천마을에서 꼭 봐야 할 장소라며, 이곳에서 꼭 방문하라고 추천받은 곳이라면서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도착하면 스탬프 찍는 곳을 샅샅이 찾아다녔고, 마침내 발견했을 때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환하게 웃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스탬프를 찍었을 것이다. 그리고 찍은 스탬프들의 개수를 보여주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등학생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말이다. 예전에 '참 잘했어요' 칭찬 스티커를 받았을 때처럼, 보물섬 지도를 가지고 하나씩 보물을 찾아가는 탐험가처럼, 아들은 그 일에 진심이었다. 딸과 나는 그런 아들을 살살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제 감천문화마을이 어떤 곳인지 잠깐 소개해보겠다. 우리가 구글에서 추천받은 곳인 것처럼, 나도 여러분에게 이곳을 방문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한 번쯤 방문하면 후회 없을 곳이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살짝 추천할 뿐이지만.
감천문화마을은 부산 사하구 감천동 산자락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주거지에서 시작되어, 1950년대 6·25 전쟁 피난민들과 태극도 신도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과거에는 '태극도마을'이라 불리던 낙후 지역이었으나,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라는 도시재생 사업이 시작되면서 전국에 알려진 부산 대표 예술마을로 화려하게 변모했다.
산비탈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파스텔톤의 주택들과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계단식 구조가 감천만의 차별화된 풍경을 이루고 있다. 흔히 '한국의 산토리니', '부산의 마추픽추'로도 불린다.
곳곳에는 다양한 예술작품들과 벽화, 조형물, 작가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감천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작은 박물관 등 고유의 체험 공간들이 가득하다.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조형물도 유명한 포토존 중 하나다. 공방에서는 도자기, 천연염색, 카툰, 판화 등을 작가들과 함께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
주민 주도의 마을 기반 소상공인들과 주민협동조합이 운영하는 다양한 카페, 분식집, 빵집 등이 있어 방문객들은 옛 향수와 현대적 편의를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옛 목욕탕을 개조한 커뮤니티 공간인 '행복발전소' 등에서는 지역 주민들 간의 소득 창출과 복지, 문화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늘마루 전망대에서는 부산항과 감천항,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일대를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있다. 이처럼 감천문화마을은 삶과 예술, 역사, 공동체가 어우러진 '살아 있는 부산의 문화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감천문화마을 구석구석 여행을 마친 우리는 부산의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물론 구글로 검색해서 찾아간 곳이지만, 부산의 명물인 돼지국밥집이었다.
돼지국밥! 전라도에 순대국밥이 있다면 부산에는 돼지국밥이 있다. 어떤 맛일까? 몹시 궁금했다.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먹어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돼지국밥과 함께 부산의 대표 면 요리인 밀면도 주문했다. 밀면은 6·25 전쟁 시절 냉면 재료인 메밀이 부족해서 밀가루로 만든 면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된 음식이라고 한다. 맛을 보니 파리에서 먹었던 '스파게티로 만든 비빔국수'와 비슷한 맛이었다.
감천문화마을 여행으로 지친 마음과 몸을 돼지국밥과 밀면으로 시원하게 달랜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피곤하고 지친 몸을 위해 센텀 스파랜드로 향했다.
여행이란 참 신기한 것 같다.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설렘도 좋지만, 막상 그 순간순간을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작은 기쁨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들이 스탬프 하나하나에 보여준 순수한 기쁨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그런 작은 보물들을 찾아가며 살아간다면 어떨까.
때로는 아이들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도 괜찮다.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우리가 놓치고 있던 많은 것들을 다시 보게 해준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며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일상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새로운 곳을 탐험하며, 작은 기쁨들을 수집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우리네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여행기가 완성되어 간다. 당신의 여행기에는 어떤 작은 기적들이 숨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