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리에서의 첫눈을 맞이하며 떠오르는 과거의 아련한 기억

연재) 늦어도 괜찮아. 50대, 파리 유학생이 되다

by Selly 정

파리의 첫눈

"엄마, 내일 눈이 온대. 그것도 엄청 많이 온대."

딸의 말은 내 귓가를 스치듯 지나갔다.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파리는 눈을 인색하게 내주는 도시다. 특히 11월의 파리는 차라리 회색 빗줄기로 하늘을 채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작년 겨울 내내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기다렸다. 마치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봤다. 그러나 하늘은 매번 나를 배신했다. 찔끔찔끔, 마지못해 뿌리듯 내리던 눈발은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렸고, 대신 차가운 빗방울들이 보도블록을 검게 적셨다.

그런데 오늘 아침, 창문을 여는 순간 숨이 멎었다.

하늘이 터진 것처럼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송이송이, 아니 덩어리덩어리. 거대한 솜뭉치들이 하늘에서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하늘 위 창고에서 하얀 깃털 베개를 찢어 털어내는 것 같았다. 눈송이들은 느릿느릿 춤추듯 떨어졌고, 세상은 순식간에 하얀 캔버스로 변해가고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아니, 심장이 춤을 췄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 앱을 열고, 창밖의 광경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아파트 건물들의 검은 윤곽 사이로 하얀 눈발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진을 SNS에 올리자마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헉, 파리에 벌써?" "한국은 아직인데!" "부럽다!" 사람들의 감탄사가 화면을 채워갔지만, 나는 이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가야 해.'

그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 눈을, 이 순간을, 그냥 창문 너머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내 피부로, 내 얼굴로, 내 몸 전체로 느껴야 했다.


눈 속을 걷다

빨간 털 스웨터를 껴입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목폴라가 턱을 간지럽혔다. 검은색 털모자를 눌러 썼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코트로 몸을 감쌌다. 마지막으로 작은 우산을 집어 들었다. 장미무늬가 새겨진, 언젠가 딸이 선물한 그 예쁜 우산.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찬 공기가 칼처럼 얼굴을 베었다. 코끝이 따끔거렸고, 눈썹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까지 얼음이 차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눈을 온몸으로 맞고 싶었다. 눈송이들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코트 위로 쏟아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이 발 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좋았다. 마치 겨울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거리의 나무들은 하얀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벌거숭이였던 가지들이 이제는 하얀 레이스를 두른 것처럼 우아해 보였다. 자동차들은 느릿느릿 기어가듯 움직였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갔다. 모두가 추위와 싸우고 있었지만, 나만은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서자 익숙한 초록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스타벅스. 창문에는 김이 뽀얗게 서려 있었고, 안은 따뜻한 주황빛 불빛으로 가득했다.

'들어가야지.'

문을 밀고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안경에 김이 서렸다. 카운터로 걸어가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을 때의 그 따스함이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목도리를 턱까지 올린 여자, 우산을 뒤집어쥐고 힘겹게 걷는 남자, 손을 꼭 잡은 채 종종거리는 연인들. 모두가 추위에 맞서고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컵을 입술에 가져갔다. 뜨거운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몸속을 데웠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 눈, 또 눈. 끝없이 내리는 하얀 눈발.

그때였다.

가슴 한쪽이 뜨끔, 하고 아팠다.

추억이 밀려왔다. 파도처럼, 거세게.


어린 시절의 눈

까까머리 소년 둘과 단발머리 소녀 하나.

마당 가득 쌓인 눈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세 개의 그림자.

"깔깔깔!" "호호호!" "우와아!"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 감지 않았는데도 그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시골 마을의 우리 집 마당. 겨울이면 눈이 무릎까지 쌓이곤 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푹푹 빠졌고, 그 느낌이 재미있어서 일부러 깊은 곳을 찾아 발을 담갔다. 엄마는 마당에 눈이 쌓일 때마다 투덜거렸다. "에휴, 이 눈 좀 봐. 언제 다 치우나." 빗자루를 들고 한숨 쉬는 엄마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우리 셋에게 눈은 선물이었다.

오빠와 남동생과 나. 우리는 눈이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손이 시려도, 발이 얼어도 상관없었다.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고, 눈사람을 굴리고, 작은 이글루를 지었다.

특히 그 이글루. 우리가 만든 작은 눈 집.

오빠가 설계를 했다. "여기는 이렇게 쌓고, 여기는 저렇게 해." 까까머리를 눈으로 뒤덮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지시하던 오빠. 남동생과 나는 오빠의 말을 따라 열심히 눈을 날랐다. 손이 빨갛게 얼었지만, 호호 불어가며 계속 일했다.

그렇게 완성된 눈 집 안으로 셋이 들어갔다. 촛불 하나를 가운데 꽂고, 쪼그리고 앉았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우리에겐 비밀 아지트였다. 오빠가 어디선가 구워온 고구마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나씩." 오빠가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나눠줬다.

우리는 그 좁은 눈 집 안에서 고구마를 먹으며 깔깔거렸다. 촛불이 우리 얼굴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춤을 췄다. 손은 시렸지만, 가슴은 뜨거웠다.

"오빠, 여기 진짜 따뜻하다!"

"그치? 내가 잘 만들었지?"

"나도 도왔어!" 남동생이 항변했다.

우리는 또 웃었다. 그 웃음이 눈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오빠

파리의 스타벅스 창가 자리.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푸치노는 식어가고 있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참으려 했지만, 눈물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빠.

청소년기에는 우리 사이가 어색했다. 남매가 으레 그렇듯, 서로 부딪치고 싸우고 멀어졌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내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오빠, 한국 집 좀 봐줄 수 있어?"

"그래, 걱정 마. 내가 다 챙길게."

당시 오빠는 법무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험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내 집을 돌봐주겠다고 했다. 나는 오빠를 믿었다. 전적으로. 오빠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자주 통화했다. 시차 때문에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리기도 했지만, 오빠는 늘 친절하게 내 질문에 답해줬다. "응, 그거 내가 알아볼게." "걱정하지 마, 다 해결됐어." 오빠의 목소리는 늘 든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쓰러졌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남동생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2년, 3년. 오빠의 몸은 점점 약해졌다. 한쪽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어눌해졌다. 그래도 오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활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회복하려 애썼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오빠를 찾아갔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오빠. 야윈 얼굴. 힘없는 미소. 그런 오빠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오빠, 괜찮아. 천천히 나아지면 돼."

"미안해. 내가 집 관리 제대로 못 해줘서."

"무슨 소리야. 오빠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데."

그러면 오빠는 또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슬펐다.

해외에 살면서 한국에 집이 두 채가 생겼다. 임대 관리, 세입자 문제, 수리, 세금. 복잡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오빠가 건강했다면 다 맡겼을 일들이었다. 나는 오빠가 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빠만큼 믿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오빠의 몸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부분 마비는 고집스럽게 오빠의 몸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오빠는 전화로라도 나를 도왔다. "그 문제는 이렇게 하면 돼." "내가 아는 사람한테 물어볼게." 몸은 아팠지만, 오빠는 여전히 내 든든한 형이었다.

마지막 통화.

집 문제 때문에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 이 건 어떻게 해야 할까?"

"음, 내가 내일 아침에 알아보고 다시 전화할게."

"고마워, 오빠. 무리하지 말고."

"응, 알았어. 조금씩이라도 운동하고 있어. 걱정 마."

"그래, 오빠도 건강 챙겨. 내일 통화하자."

"응, 안녕."

"안녕."

전화를 끊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파리 시간으로 오후 4시쯤이었을까, 5시쯤이었을까.

핸드폰이 울렸다. 카톡이었다. 조카였다.

"이모, 아빠가 지금 응급실에 실려갔어."

심장이 멎었다.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넘은 시각. 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조카만이 나와 자주 연락했기에, 내 카톡을 알고 있었다.

"지금 어떤 상태야?"

"잘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님이 심각하대요."

손이 떨렸다.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비행기를 알아봤다. 하지만 코로나였다. 2020년. 세상이 멈춰 있던 그 시기. 국경이 닫혀 있었다. 가족 장례식조차 갈 수 없었다. 부모의 죽음, 형제자매의 죽음에도 예외는 없었다.

"안 돼. 안 돼. 제발."

나는 기도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기도했다.

하지만 오빠는 깨어나지 못했다.

54세.

아직 젊지 않은가. 아직 할 일이 많지 않은가.

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제 통화했는데.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오빠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게 제일 억울했다.

형제 자매가 죽었는데도 올 수 없게 만든 정부가 미웠다. 이 바이러스를 퍼뜨린 중국이 미웠고. 세상이 미웠다.

한국에 있던 딸이 장례식을 녹화해 뒀다. 파리로 돌아올 때 그 영상을 내게 보여줬다.

"엄마, 미안해. 그때 바로 보내주지 못해서. 엄마가 너무 충격 받을까 봐..."

딸의 목소리가 떨렸다.

영상을 틀었다. 오빠의 사진이 잔디장 위에 놓여 있었다. 사진속 오빠의 얼굴이 참 평온해 보였다. 잔잔한 미소는 평상시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 나는 화면을 응시하며 울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영상은 지금도 내 핸드폰에 있다. 지울 수 없다. 절대 지우지 못 할 것이다.


다시, 파리의 눈

스타벅스 창가. 커피는 완전히 식었다. 눈물 자국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의 단발머리 소녀.

코 흘리는 까까머리 소년 둘.

마당을 뛰어다니며 자지러지게 웃는 세 명의 아이들.

"하하하, 아, 손 시려! 호호호!"

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춤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여미고, 모자를 눌러 썼다. 우산을 들었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다시 얼굴을 때렸다. 눈송이들이 내 주변으로 소용돌이쳤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얀 눈발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빠."

나는 작게 속삭였다.

"오빠, 어릴 적 그 장면 기억나? 눈 집 만들고, 고구마 나눠 먹던 거. 우리 셋이 깔깔거리며 웃던 거."

눈송이 하나가 내 볼에 내려앉았다. 차가웠다. 아니, 따뜻했다.

"오빠는 지금 거기서 행복하게 웃고 있겠지. 아프지 않고, 자유롭게."

나는 걸었다. 눈 쌓인 거리를. 발자국 소리가 뽀드득, 뽀드득 울렸다.

오빠가 보고 있을 것이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오빠, 나는 여전히 오빠를 그리워해. 매일. 특히 눈 내리는 날엔."

눈은 계속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파리의 겨울은 이제 슬픔이 아니었다. 그리움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창밖을 바라본다. 온 세상이 하얗다. 지붕도, 나무도, 거리도. 모든 것이 눈으로 덮여 고요하다.

나는 창문에 손을 댔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을 얼렸다.

"안녕, 오빠. 또 내일."

눈은 밤새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 세상은 더 하얗게 변해 있을 것이다.

오빠와 함께 뛰놀던 그 하얀 겨울처럼.



이 글은 오빠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술과의 오랜 여정, 그리고 새로운 친구로서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