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소설중에서]
이 문장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합니. 가슴이 먹먹하다. 무슨 말일까? 문자의 의미는 알 듯 한데, 맞는 표현일까? 나도 확신하지 못할 단어입니다. 마음이 미어지다’라는 이 표현 또한 같은 의미인 듯 한데, 과연 올바른 표현인지? 이 또한 확신할 수없습니다. 그렇지만 먹먹한 가슴, 미어지는 가슴이 어떤 느낌인지는 압니다. 제가 이 문장을 읽으면서 느낀 아스라히 전해져 오는 감정이었스니까요.
이 문장은 저에게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움!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미어지게 만든 단어, 그리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가슴이 먹먹해오는 그리움을 느꼈습니다.
아침, 낮, 저녁, 밤,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도 느껴졌던 그리움!.
제 인생에서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이제는 나의 절친이요, 나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그리움이라는 단어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지 오랜 세월이 된 듯합니다.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요?
그래요, 고등학교때로 올라갑니다.
중학교3학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부모님을 설득해서 저는 고등학교를 집에서 아주 먼 타향으로 갔습니다. 중학교 시절 가깝게 지낸 친구 한명없이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시작했습니다. 부모님과 가족들이 보고 싶고 친구들이 보고싶어서 매일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매주 토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시골 집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인생에서 겪지 말아야 할 일들도 경험하면서 점차 타향살이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하면서 저의 고향에대한 그리움의 몸부림과 아픔은 차차 내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처음으로 겪었던 그리움 몸살 앓이였나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해외 건설회사에 취직이 되어 한국에서 아주 먼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1년 정도 후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3년이라는 세월이 어느새 흘렀습니다. 회사 규정상 가족 동반이 안되었기에 3년동안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받은 많은 도움으로 자녀를 키우고 나 홀로 가정을 꾸리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문득 문득 느껴지는 남편의 빈자리는 [새벽 세시, 바람이 가슴 속을 세차게 불면서 지나갔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가슴속 가운데 자리에는 차가운 냉기가 후집고 간 커다란 상처의 흔적들이 덩그러니 쓸쓸히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심한 그리움의 가슴 앓이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그림움이라는 단어는 제 곁을 더 이상 떠나지 않고 아예 본격적으로 오랜 친구처럼 제 곁에 머물러 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아예 둥지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쫓아 내려고 해도 다시 어느새 돌아와 둥지속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남편과 온 가족이 해외 생활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첫 째 아들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위해 가장 먼저 부모곁을 떠나갔습니다.
아들과의 헤어짐으로 인한 그리움의 세번 째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었습니다. 내안에 둥지를 튼 녀석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자라 덩치가 더 커졌나봅니다. 첫째 아들을 멀리 타국에 보내고 엄마가 앓는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남편과 3년동안 떨어져 산 순간속에서 느끼는 허전함과 알싸한 아픔보다 더 큰 가슴 먹먹함이었습니다.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날카로운 뭔가로부터 빙글 빙글 돌면서 제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을 동반한 그리움앓이였습니다. 이때부터 였을까요? 저는 아예 그리움과 동거동락을 시작했습니다.
거주하고 있던 나라가 혼란으로 인해 저는 한국과 남편이 머물고 있는 나라를 오고 가면 살았습니다. 1년은 한국에서 1년은 다시 남편곁으로, 다시 한국으로 다시 남편곁에서 1년을 보내는 등 안정을 찾을 수없는 해외생활을 반복하고 살았습니다. 큰애는 미국에, 남편은 북아프리카에, 나와 아이들은 한국에 머무는 생활을 몇 년동안 반복했습니다.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생활은 그리움의 상처가 점점 조금씩 단단하게, 딱지로 굳기 시작했습니다. 반복된 이별의 삶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익숙하게 만들었고, 작으마한 딱지가 된 그리움은 어지간한 바람에도 느낌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히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멍하니 들여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리움은 늘 상 내 곁에 있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와 함께 세월의 나이를 먹어가는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같은 그리움의 딱지는 제 살 속에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제 살갗처럼 깊숙히 자리잡으려고 합니다. 그리움은 이제 너의 존재 그 자체야!라고 말하고싶어합니다.
큰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지 어언 3년이 다 되어갈 즈음, 그리고 한국과 북아프리카를 오고 가며 살아가고 있을 즈음, 더이상 남편의 회사가 있는 나라에 더이상 갈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회사일과 가정 경제에 대한 책임감으로 계속 해외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때 시기에 둘째 아들 또한 큰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아들 둘은 미국에, 남편은 아프리카에, 그리고 나와 딸은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5가족이 3군데 나라에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서로의 그리움을 달래는 도구는 Skype와 카톡의 영상 통화였습니다. 두아들이 한 곳에 함께 있기에 그것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고, 남편 또한 함께 할 수 있는 한국분들이 계셨기에 이 또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나는 딸이, 그리고 주변 친구들과 부모님이 위로가 되었습니다.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16살과 17살에 때 헤어진 아들들은 큰애는 3년만에 만날 수 있었고, 둘째아들은 12년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6년동안 skype와 카톡으로 안부를 전했습니다.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그리움은 점점 단단한 딱지가 되어갔습니다. 이제 그리움은 내 곁에서 묵묵히 세월을 함께 먹어가는 아픈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움의 상처는 여전히 가끔 가렵고 근질거렸습니다. 그리움은 여전히 내 안에서 떠나지 않았고, 때때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처럼 그리움의 딱지가 다시 갈라져 피와 진물이 섞여 흐르며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 속 깊은 곳이 또다시 아파왔습니다. 그리움은 마치 큰 구멍이 난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그 틈을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12년만에 만난 아들과 언제나 엄마를 챙겨주는 다정한 큰아들과 그의 여자친구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6박 8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엇보다 12년만의 시리고 아팠던 그리움이 해갈이 되니, 이제는 덜 슬픈 마음이려나 했는데, 쩍쩍갈라진 마음의 고랑 사이 사이가 6박 7일동안 아들과의 여행이 가져다 준 행복으로 메꿔져서 아픔의 진물은 더이상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끔씩, 아주 가끔씩 여전히 새벽세시, 바람은 차갑게 불어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찬바람도 예전만큼 시리게 차갑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듯합니다. 이제는 그리움도 나의 일부가 되어, 그와 함께 더불어 세월을 보냅니다.
누구에게나 새벽 세시, 바람은 불어 올 것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 그 사이의 시간들 속에서, 그리움은 언제나 곁에 있을 친구이자 동반자입니다.
새벽 세시, 당신곁에서 어떤 바람이 불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