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 강에서 다시 만난 제인 에어
파리의 일요일 오후는 유독 고요하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도시 전체가 한 템포 느려진다. 오늘도 그런 일요일이었다. 센 강변의 작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에, 나는 20년 전 중학생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Jane Eyre』.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근처의 작은 프랑스 헌책방에서 마주친 낡은 영어판 제인 에어는, 마치 오래된 친구가 "안녕, 오랜만이야"라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참 많이 흔들렸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생이던 나에게 세상은 끝없는 비교의 무대였고, 어른들의 무심한 말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냈다.
"누구는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다는데, 너는 뭘 잘하니?"
이런 말들이 마치 날카로운 화살처럼 가슴에 박혔다. 바쁜 부모님은 자신의 일에는 성실했지만, 나를 향한 관심은 늘 부족했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해줄 존재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때 만난 것이 바로 제인 에어였다.
1990년대 중반, 언니가 사온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었다. 요즘처럼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 책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 묵직하고 두꺼운 책을 밤새 읽으며, 나는 제인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제인의 삶은 고아원에서 시작되었다. 나처럼 특별히 화려하지 않은 외모, 눈에 띄는 재능도 없는 평범한(아니, 평범 이하의)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것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내면이었다.
"Do you think, because I am poor, obscure, plain, and little, I am soulless and heartless?" (내가 가난하고, 무명이고, 평범하고, 작다고 해서 영혼도 마음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제인이 로체스터에게 던진 이 말은 중학생이던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 외모나 집안 배경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아니구나.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여행 에세이를 쓰는 지금, 나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제인을 바라보게 되었다.
파리에서의 삶은 매일이 도전이다. 프랑스어로 수업을 듣고, 현지인들과 소통하며, 동시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때로는 언어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문화적 차이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제인의 모습이다. 손필드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며 계급 차이와 사회적 편견을 마주했던 그녀처럼, 나 역시 이방인으로서 파리에서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 오후, 센 강변 벤치에 앉아 다시 읽기 시작한 제인 에어는 2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감동을 주었다.
중학생 때는 제인의 '불굴의 의지'에 감동받았다면, 지금은 그녀의 '독립적 사고'에 더 주목하게 된다. 로체스터와의 사랑에서도 그녀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추구했다. 21세기를 사는 여성으로서, 이 부분이 새롭게 와닿는다.
파리의 여성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사랑하되 의존하지 않고, 배려하되 희생하지 않는다. 마치 제인 에어가 추구했던 평등한 사랑의 모습과 닮아있다.
흥미롭게도 제인 에어는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에서 시작해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여정은, 지금 파리에서 생활하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제인이 로체스터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처럼, 나 역시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써내려가고 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행 에세이를 쓰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좋은 글이란 결국 '진정성'에서 나온다는 것. 제인 에어가 15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낸 이유도 바로 그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샬롯 브론테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인 인물을 창조했다. 제인은 아름답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지만,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힘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내가 파리에서 경험하는 일상들을 글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솔직한 감정을, 과장된 표현보다는 진실한 순간들을 담으려고 한다. 제인이 그랬던 것처럼.
센 강변에서 다시 읽은 제인 에어는 2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책이 되어 있었다. 아니, 책은 그대로인데 나라는 독자가 달라진 것이다.
중학생 때는 제인의 '생존'에 주목했다면, 지금은 그녀의 '성장'에 더 집중하게 된다. 고난을 견뎌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단순히 '견뎌내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이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한 권의 책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올 줄 몰랐다. 파리의 느린 일요일 오후가 선사한 뜻밖의 선물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몽마르트 언덕의 작은 카페에서도 제인 에어는 내 옆에 놓여있다. 가끔 책장을 넘기며 밑줄 친 문장들을 다시 읽는다.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 같은 존재다.
"독립적이고 진정성 있는 삶."
이것이 제인 에어에게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가치다.
파리에서의 남은 시간들도 제인처럼 살아보려 한다.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나만의 목소리로 나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여행 에세이 작가가 되는 길이 아닐까?
안녕, 제인.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너의 이야기는 오늘도 새로운 용기를 준다. 파리에서 만난 너는 20년 전보다 훨씬 더 특별한 친구가 되어주었어.
오늘 소개한 책
� 『Jane Eyre』 - Charlotte Brontë (1847)
�� 파리에서 찾을 수 있는 곳: Shakespeare and Company, 생미셸 거리 헌책방들
� 추천 포인트: 여성의 독립성과 진정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 명대사: "I am no bird; and no net ensnares me: I am a free human being with an independent will."
'파리 일기'는 파리에서의 일상과 독서, 그리고 삶의 순간들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연재 에세이입니다. 책을 통해 발견하는 파리의 새로운 면모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겪는 성장의 이야기들을 계속 전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