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그 장터의 풍경
여행 다섯째 날 아침, 부드러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던 그 순간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오늘은 어디에 데려갈 거야?"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견과류 사러 시장에 갑시다." 순간 '시장? 무슨 시장?' 하는 호기심이 불쑥 솟아났다. 알고 보니 이곳에도 한국의 시골 5일장처럼 5일마다 열리는 시장이 있었고, 오늘이 바로 그 특별한 날이었다.
해외 생활 동안 익숙해진 현대적인 쇼핑몰과 마트 대신, 어린 시절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니던 그 정겨운 장터가 이 먼 곳에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렜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남편과 함께 시골 5일장으로 향했다. 장터에 들어서자 어린 시절 기억 속 풍경이 펼쳐졌다. 신선한 농산물이 가득한 좌판, 양과 염소 같은 가축들이 조용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고, 색색의 옷가지와 수공예품, 향신료와 생활용품들이 정겹게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때로는 가난해 보였지만,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인간미가 나를 금세 사로잡았다.
가이드의 안내로 견과류를 파는 작은 좌판에 다가갔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장사하는 소박한 일터였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도와 장사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밝은 눈웃음을 지으며 아몬드, 마른 포도, 호두, 북아프리카의 대추열매, 올벼쌀, 호박씨 등 다양한 견과류와 곡식을 샀다.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 관광객에게 평소보다 많은 물건을 팔게 된 그 부자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고, 가이드와 남편과 함께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흥정을 했다. 그들의 소박한 웃음과 정겨운 대화가 장터의 따뜻한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꽃무늬가 새겨진 속바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시골 풍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할머니와 엄마가 입던 작은 레이스가 달린 하얀 속바지, 얼룩덜룩한 몸빼바지들, 길고 짧은 속옷들. 엄마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기라 그리움과 슬픔이 갑자기 밀려왔다.
'엄마, 나 저거 먹고 싶어! 엄마, 이거 사줘!' 하고 때를 쓰던 내게 엄마가 사주던 커다란 하얗게 부푼 호빵과 장터 여기저기를 누비며 먹던 선지국 한 그릇이 떠올랐다. 커다란 꽃장식으로 가득 찬 원피스를 입고 5일장터를 누비던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속바지 가게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속으로 엄마를 불러보았다. '엄마!'
시장은 젊은 상인 몇 명이 모여 활발하게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고, 어린 소년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상인들이 오늘 하루 장사 대목을 기대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와 새벽부터 시작한 장사에 지쳐 흙바닥에 누워 잠시 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안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단순한 관광객 시선으로 시골 5일장을 바라보았다면 초라하고 별 의미 없는 경험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본 시골 5일장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 귀한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태어나 가족과 지인들과 더불어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다가, 순서 없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인생임을 철학자처럼 배운 하루였다. 이 소박한 시골 5일장터에서 느낀 인간미와 삶의 깊은 울림이 오래도록 남아, 행복한 여운으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