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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소유하려는 욕망인가, 벤저민 그레이엄

인생이야기 5

by 류운천

연애는 신선함을 찾는 과정이고 사랑은 매력을 찾는 과정이다. 사랑은 매력적인 상대를 독점하고자 한다. 사랑의 매력은 상대의 결점마저도 덮어버린다. 사랑은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상대의 결점마저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일까. 진정 사랑은 상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욕망을 투영한 환상인가.


니체는 말한다. 사랑은 선과 악의 소유욕이자 상대방을 자기화 시키려는 욕망이다. 상대의 매력을 내 울타리 안에 가둬두려고 한다. 심지어 그 욕심을 정당화하면서 “그만큼 사랑하니까”라고 말한다. 사랑은 허용한다. 사랑은 욕심을 부리는 것도 허용한다. 그렇다면 욕심이 많은 사람이 사랑을 얻게 되는 것인가. 용기있는 사람이 사랑을 소유하는 것인가.



'투자의 전설'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은 대학교를 2년 반 만에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영문학, 철학, 수학 교수 자리를 제안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연애에는 그렇지 못했다. 숫기가 없어 여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연애 경험도 없었다. 형은 여자 친구를 사귀는 데 능숙했다. 여자 친구를 만날 때마다 천재 동생을 자랑삼아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형이 좋아하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벤저민이 보기에 형이 좋아하는 ‘헤이즐(Hazel)’은 완벽한 여성이었다. 예쁘고 똑똑한 데다 차분하고 여러 방면에서 상식과 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아량도 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줄 줄도 아는 마음씨 좋은 여성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자신감이 지나치고 단점이 없다는 게 단점이다. 헤이즐 역시 형보다는 벤저민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때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헤이즐이 보스턴에서 근무하다 돌아오자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1914년 대학 졸업 후 증권사에 취업한 벤저민은 헤이즐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당신은 내 그리움과 열망의 대상입니다.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 해는 1차 세계대전 발발로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벤저민은 취업을 했고 부업으로 학생을 가르치며 투자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1916년 23세에 약혼하고 이듬해 결혼한다. 당시 벤저민의 나이가 너무 어려 헤이즐의 어머니는 면도는 며칠에 한 번씩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함께 아이를 키우며 동고동락했다. 헤이즐은 강인하고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한 여자이고, 벤저민은 가끔 멍하니 딴생각하기도 하고 사소한 문제를 신경쓰지 않는 영국신사였다. 서로 다른 성향은 결국 큰이 되었고 43살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이 흔치 않았던 당시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이후 벤저민은 헤이즐과 이혼 후 2번 더 결혼했다. 또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벤저민은 회상한다. 인생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아무 의미는 없는 논리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런 헛수고를 해봐야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될 뿐이고 그마저도 항상 뒤늦은 깨달음일 테니, 억누를 수 없는 회한만 가득한 인생이구나! 60이 넘은 나이에야 비로소 사랑은 숱한 경험 중 하나가 아니라 인생 경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드라마 빠담빠담의 한장면


사랑은 사과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부터 거의 10년 전 청춘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TV드라마가 화제였다. 정우성과 한지민이 주연을 맡은 작품인데 겉으로는 평범한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사랑의 진정성과 오해, 감정의 충돌을 깊이 있게 그려낸 사랑이야기였다. 특히 정우성이 한지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다. 한지민에게 입맞춤까지 했다가, 자신의 마음과 그녀의 생각이 다르다고 느낀 정우성이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떠나려는 한지민의 앞을 가로막고 울먹이며 절규한다.


“왜 나한테 화났어요.

내가 그 쪽한테 입 맞춘 게 그렇게 화날 일이에요?

나는 머리가 모자라고 멍청해서 빙빙 돌려 말하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내가 헷갈리지 않게 말해요. 내가 싫어요? 그래요?

나한테 한 행동은 동정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입 맞춘 거 가지고 사과해야 해요? 미안하다고.

내가 그쪽을 좋아한 게 사과할 일이에요?

남자가 여자 좋아한 게 뭐가 문제라고.

만약에 사과하면 그쪽이 해야지.

나는 그쪽이 좋은데 그쪽은 내가 싫으니까,

나한테 사과해야지. 사과해요! 나한테!”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를 지른다.


이 장면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혼란, 분노, 슬픔, 절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진심이 모욕당한 듯한 느낌에 아파한다. 사랑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진심을 전한 사람에게, 그 감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과를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 단순한 남자의 독백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 여자에게 진심이 고스란히 담긴 외침이기에 보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정우성의 외침은 많은 시청자에게 용기를 주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데 눈치를 보거나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과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감정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드라마는 진한 감정선으로 전달했다. 극중의 한 장면이지만, 그 안에는 철학이 있었고, 살아 있는 사랑의 본질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과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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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본질을 마주할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예쁘고 생기발랄했다. 나는 사회 초년생이었고 촌티를 벗지 못한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우린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였기에 지나다 만나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주변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와 나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회식때면 옆자리에 앉게 하고, 서로 마음에 든다고 했다는 둥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 사무실에 뭔가를 빌리려 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전화번호 주세요”, 그녀가 답했다. “남자 친구있어요”,

“나도 여자 친구있어요”, “그런데 왜 물어보세요”,

“전화하려고요”. 그녀는 전화번호를 주었고 우리는 만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왜 전화번호를 줬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화학반응의 산물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전혀 보이지 않은 아름답고 고귀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거기에 마음을 묶는 일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까 의구심이 드는 사랑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완전히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그것은 욕망이며, 상대를 통해 나 자신을 완성하고 싶은 깊은 소유욕이다. 니체는 이 불완전한 감정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도 그 본질을 마주할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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