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안 Sep 15. 2023

때로는 '악한 가면'이 필요한 이유


선하다는 기준이 뭘까?

그럼 착하다는 것은 뭘까? 

선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다는 뜻이고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한 것은 

착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애매하다. 


주관적인 요소가 충분히 끼어들만한 표현이다.

그래서 난 선하다. 착하다.라는 말이 불편하다. 

정확히는 싫다.


누구를 위한 '선'인지에 따라 그 결과가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를 온전히 교회에 바친 친구가 있다.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다.

나름 목사나 전도사와 같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선하고 착하다는 기준처럼 

그렇게 바르고 양심적으로 살아왔다. 

세상과 등지고 교회에 봉사하면서 말이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다. 

돈문제에 부딪혀 더 이상 사명감당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정작 자기 앞가림을 해놓지 못해 

쌓아두었던 문제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가족도 돌보지 

못했고 건강도 경제도 다 놔버렸던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종교라는 미명하에 

자신이 선택한 '봉사'였다.


그 시간들은 버겁고 무거웠지만 그 친구에게

또 다른 가치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하게 살고자 했던 그 신념은 

현실 앞에 무너졌고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른 이들보다 뒤처져 있고 

남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말할 것이다. 

" 너의 선택이었잖아. 누구를 원망할 수 없어." 

냉정하게 본다면 그 말이 맞다. 


그 친구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교회가 원망스러운

복합적인 감정에 혼란을 겪고 있다.


 

1. 나를 위한 선은 무엇일까? 


신을 위해 선하게 

타인을 위해 선하게 사는 것은 

숭고하고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전에

나에게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타인만을 위한 선'은 

나에게 독이 되기 때문이다.


20대를 교회에 봉사한 청년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 청년이 사명의 길을 걸어가고 교회 안에서 

꿈을 이루고 만족하면서 살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명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순수한 믿음은 배신감과 원망으로 

얼룩질 수 있다. 


그 청년은 생각했어야 했다.

나에게 선한 선택을 한 것일까?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일까? 


" 내가 바친 시간이 얼마인데 신은 

왜 나의 현실적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 


이렇게 원망하는 것은 애꿎은 신을 탓하는

것일 뿐이다. 




비단 거룩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상황을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옛날 엄마들은 특히나 가족과 친지들에게 

돈 빌려주고 보증 잘 못서서 망한 케이스가 많다. 


남들에게는 세상 착한 천사고 

선한 사람이자만

정작 내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는 나쁜 사람인 것이다.


나에게 먼저 선할 수는 없을까? 

'악의 가면'을 잠깐 쓰더라도 말이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당장은 냉정하고 

당장은 매정하게 느껴지더라도 

도덕적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2. 선과 악의 가면을 구분하기.



선은 악한 가면을 쓰기도 하고 

악은 선 한가면을 쓰기도 한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가족이라도 매정하게 끊어야 할 때가 있다면 

그건 '악한 가면'을 써야 할 때다. 


반면 나의 아픔과 고통은 꾸역꾸역 

밀어 넣고 그저 타인의 눈치만 보거나 

마음이 약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그건 '선 한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내가 먼저여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 내가 살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비행기에서도 위급상황이 오면 

스튜어디스부터 산소마스크를 쓰고 

승객들을 씌운다. 


일단 승무원이 살아야 승객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선 한가면'을 억지로 쓰고 살지 말자.

잠깐의 악해 보이는 가면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필요하다.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난 지금에서야 새삼 큰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난 큰엄마를 미워하고 너무 싫어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큰엄마는 친척들에게 

항상 냉정하고 자기 가족밖에 몰랐다.


울 엄마가 시어머니 용돈 드리는 모습을 보고 

" 동서 그렇게 자꾸 주면 버릇된다. 그걸 모아야

내가 사는 거야."

 

라면서 악의 가면을 쓰고 말리는 

불효 며느리였다. 


친척끼리 왕래할 일이 있어도 돈을 아끼려고

일체 만나지 않았고 큰아빠 월급의 80%를 

저축하면서 살았다. 


지금은 어떨까?

재테크로 성공해 

현금으로 50억이 있고

부동산도 여러 개 있다. 

솔직히 최후승리자처럼 보인다. 


물론 너무 극단적으로 남을 배척하고 살거나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흥청망청 남에게 퍼주고 

70세가 다 되는 나이에 투잡을 뛰고 있는 

엄마보다는 훨씬 형편이 좋아 보이 신다. 


신랑이 한번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

" 여보 어머니가 돈 빌려주고 도와준 사람들 

사실은 당신이 받아야 할 혜택을 가로챈 거야."

 

그 말을 듣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하면서도 뼈를 맞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딱 그렇긴 하다.

정작 자식이 어려울 때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자신도 생활에 급급해졌으니 말이다. 


엄마의 선함이 자기 자신을 찌른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이 잘되기만 하면

나는 망가져도 좋다는 마인드라면 인정하겠다. 

하지만 엄마도 결국은 지난날을 후회하신다.


'선한 가면을 쓰고  살아온 자신을 '


신의 경지에 이르거나 

도를 닦는 사람이 아니라면 

먼저 자신에게 선할 필요가 있다. 


장미도 가시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누구나 가시하나쯤은 품고 살아야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배움, 하루를 살면 하루를 배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