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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May 03. 2022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김태훈 저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순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인(saint)이면서 영웅(hero)이니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작가 김태훈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이순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다. 1차 사료를 찾아 공부하면서 저자는 심지어 많은 역사학자들도 이순신의 본 모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게 됐다고 한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순신 보고서는 그렇게 작성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오늘을 위해 밝히는 역사의 진실'이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이름

이순신 형제들은 신(臣)자 돌림이다. 이순신의 부친은 중국 고대 왕들의 이름을 따서 중간 글자에 넣었다. 순임금을 본받으라는 의미였을까. 이순신은 애민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애민정신은 결국 올바른 정책으로 발현된다.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피란민들은 이순신의 부대를 따라다녔다. 섬이 됐든 반도가 됐든 적절한 땅이 나타나면 둔전을 만들어 피란민들이 농사를 짓게 했다. 수확을 나누어 피란민과 병사들의 식량으로 삼았다.


원균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7살이나 많다. 그는 경상 우수사였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였다. 1592년 4월 일본이 처들어 왔을 때 원균은 배와 무기를 수장시키고 도망치려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도망치는 대신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해전을 임하게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저자 김태훈은 원균이 문제가 많은 용렬한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원균도 평범한 인간의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부산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왜적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야 하는 준비되지 않은 장수의 운명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원균은 사사건건 이순신과 부딪혔고 이미 죽은 왜적들의 수급을 베기에 급급할 정도로 야비했으며 결정적으로 부하들과의 소통을 전혀 하지 않는 권위적 리더였다.


이순신이 3 수군통제사에서 해고된  원균이  자리를 차지한 배경에는 원균의 출세지향적 처세도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결국, 첩까지 전장에 데리고 다니며 흥청거리던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 전체와 함께 멸망한다.


전략가이면서 정치가였던 이순신

판옥선과 거북선은 이순신이 개발한 배가 아니었다. 이미 존재했던 배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판옥선을 더욱 견고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조선초였던 태종때 이미 등장했던 거북선도 이순신은 왜선들 사이를 마음 껏 누빌 수 있도록 보완했던 것이다.


치밀한 준비, 병사들에 대한 엄정한 규율, 피란민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 등 이러한 요소들이 왜적들로 하여금 이순신을 위대하면서도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전쟁 초기 한산해전, 그리고 원균이 이끌던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된 수군을 재건한다. 배설이 빼돌린 판옥선 12척으로 기적같은 승리를 이룩한 명량해전,  퇴각하는 일본 수군을 혼구녕을 내줘야 한다며 참전한 노량해전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항상 선봉에  있었다.


必生則死, 死則必生(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一夫當逕 足懼千夫(한 사람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572쪽)


이 글은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하루 앞둔 1597년 9월 15일 <난중일기>에 적은 글이다.


물러서지 않는다

이순신은 32세가 되어서야 문과가 아닌 무과에 급제한다. 그것도 한두번 낙방하고  후였다. 갑을병 중에서 세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병과에서 일등이 아닌 4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니 이순신이 뛰어난 문재나 무재가 있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거다. 피나는 노력으로 당시로서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말단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거나 약삭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 상관이라도  못된 판단을 내리면 가차없이 비판했고, 고위관리가 첩의 딸을 자신의 첩으로 내려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하늘같이 높은 관리가 화살을 담는 통을 달라는 하찮은 부탁조차 거부한다.


자신과 자신의 식솔에게는 청렴을 강조해 엄격했다. 그리고 부하와 민초들의 삶에는 깊이 관여해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었다. 권력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장수였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는 절대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평범한 인물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가치관을 흐트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엄격함으로써 비범한 인물로 나아갔다.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의 유언이다. 이순신은 다른 장수와는 달리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내도  만나지 않을 정도로 금욕과 절제를 생활화했던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냉철한 언론인이라고   있던, 사관(史官)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겼던 실록의 일부를 보면 이순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객관적으로   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1596년과 1597년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한산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전라도와 충청도)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6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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