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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Apr 06. 2022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

박경리 선생이 30대 중반에 출간한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이름은,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다. 용숙은 부잣집에 시집을 갔지만 과부가 되고, 둘째 용빈은 서울서 공부해 교사가 된다. 용란은 김약국의 머슴, 한돌이와 바람이 난 후 아편쟁이한테 시집을 가는 신세가 된다. 다섯 딸들 중 인물이 가장 떨어지지만 속은 꽉 찬 넷째 용옥은 김약국이 신뢰하는 일꾼, 기두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기두의 마음은 용란에게 있었기에 사랑을 받지 못한다. 김약국의 사촌 누이 연순을 닮은, 막내 용혜는 김약국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박경리 기념관, 통영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통영이다. 시간적 배경은 흥선대원군이 집권을 시작하던 시기에서 일제 강점기 중 문화 통치기에 속하는 1930년대까지.


김약국의 본명은 김성수, 그의 큰아버지 봉제가 운영하던 약국과 재산을 물려받아 김약국이 됐다. 그런데 김약국은 불행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사내다. 친부 김봉룡의 학대와 의처증을 견디다 못해 모친인 숙정이 음독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봉룡은 숙정을 찾았던 사내를 좇아가 칼로 살해한다.


그리고는 통영을 떠나 행방불명된다. 자식이라고는 허약체질의 딸, 연순뿐이던 봉제는 성수를 입양해 아들로 삼는다. 성수의 수호자, 봉제는 독사에 물려 사망한다.


김약국이 된 성수의 가족 구성원들이 겪는 비극은 너무나도 참혹하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소설 속 주인공들이 백 년도 더 전에 겪은 이러한 처참한 경험들이 혹시 오늘날을 사는 현대의 어떤 이들에게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100년 전 통영은 당시 조선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고종과 민비가 끌어들인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몰살시켰듯이, 김약국 집안은 무너저 내린 봉건제도와 거칠은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철저하게 유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밖에 모르는 큰 딸, 파락호 사위, 며느리를 욕보이는 시아버지, 아편중독자에 살해당하는 장모의 등장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봉제는 딸, 연순을 강택진이라는 천하의 파락호 - <토지>의 김평산이 연상되는 인물이다- 에게 시집보낸다. 병든 딸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봉제가 독사에 물려 죽자, 시동생의 아들인 성수를 마뜩지 않게 보던 아내 송 씨는 사위 택진에게 재산이 넘어가도록 조력한다. 그러나 연순이 죽자 택진은 장모 송 씨를 배신한다.


성수가 분시라는 여성(한실 댁)과 결혼하고 김약국이 된다. 김약국 내외는 첫아들이 6살을 못 넘기고 죽자, 내리 딸만 다섯을 낳게 된다.


용숙은 말이 많고 욕심도 많다. 시집을 가자마자 과부가 되지만 이내 시집의 재산을 노리는 시동생과 대립하며 자신의 보신과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의 안녕이다. 병약한 자신의 아들을 진료하기 위해 왕림하던 의사와 바람이 나고, 소문도 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매점매석과 돈 놓고 돈 먹기로 마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용빈은 딸들 중 가장 믿음직스러운 자식이다. 김약국도 중요한 일은 용빈과 상의하고 결정할 정도다. 서울서 공부를 해 교사가 된다. 성수의 백부 봉제가 살아있던 시절, 좀도둑질을  일삼고 험담을 좋아하던 하동댁이라는 여성의 손주인 정홍섭이 용빈과 혼인을 준비하지만, 김약국의 가세가 기울자 파혼해 버린다.


용란은 미모가 가장 뛰어나다.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여성이었다. 사세에 좌우되는 여자가 아니었다. 김약국의 심복인 서기두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있었지만 머슴 한돌과 바람이 나는 통에 비극적 운명의 회오리에 휩싸인다. 한돌은 김약국의 집에서 쫓겨나 멀리 떠나고, 깨진 접시 취급을 받던 용란은 결국, 아편쟁이 연학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연학이 감옥에 갇힌 틈을 타 용란은 한돌을 다시 만나고, 한실댁은 그 둘을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금붙이를 들고 나선다. 용란과 한돌이 숨어 지내던 곳에 도착한 한실 댁은 사위 연학의 도끼에 맞아 죽는다. 도끼의 희생자 중엔 한돌도 있었다. 애인과 모친의 충격적인 죽음은 용란을 광녀로 만든다.


용옥은 얼떨결에 서기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러나 서기두는 용란을 마음에 품었던 남자다. 용옥을 여자로 보지 못하게  이유다. 밖으로 도는 남편 대신 시아버지 서영감이 밤중에 문고리를 따고 용옥의 침소에 들어가 욕을 보이려다가 실패한다. 아이를 업고 남편이 있는 부산을 찾아 나선 용옥은 승선했던 화물선이 침몰하면서 수장된다.


막내 용혜는 부친인 김약국이 위암으로 죽고 나서 용빈을 따라 상경한다. 통영에는 일찌감치 가족과 결별한 후 갑부가 된 용숙만 남게 된다. 미처버린 용란과 함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장편 대하소설 <토지>의 서문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비루한 삶을 이어가던 민초들의 피와 한을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김약국의 딸들>을 통해 박경리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역의 토호였던 유력한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는 일이 때로는 통쾌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이유는 김약국이라는 인간의 행위와 마음가짐이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겸손과 신뢰라는 당시의 가치에 부응하고 있는 인물이다. '조선의 나폴리'로 불리던 아름다운 항구도시 통영과 바로 이 통영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의 통영 앞바다

구한말의 조선은, 머슴과 아편쟁이, 좀도둑, 욕정과 육욕에 눈이 먼 오입쟁이, 배금주의, 평등사상, 어설픈 자본주의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런한 사회 병리의 직접적 피해자가 김약국 집안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문제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소한 범죄와 거악의 조밀한 조합이 너무나도 공고하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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