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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May 04. 2022

시나리오 작가의 그림일기

아제세이, <천공의 섬 아저씨>를 읽고


아재세이(ajaes-say)라는 장르를 달고 어느 중년 시나리오 작가의 글과 그림 모음집이 나타났다. 제목은 <천공의  아저씨>.


 


결혼을 하기 전 그저 어떤 부모의 자식이던 시절의 젊은이는 철부지라고 불린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장이 된다. 가장은 철이 든다.


어깨와 머리 위에 잔뜩 짐을 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가장의 삶은 진지하고 무거워(愼重) 진다. 아무것도 혼자서 결정하면 안 된다. 혹시라도 홀로 결정했다면 항상 뒷 일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기간, 인생은 고달파진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이 생겨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 간헐적 행복을 위해, 대부분의 날들은 인내와 헌신을 필요로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 이제는 미래도 사라졌다. 이제 나는 과거가 됐고, 아이가 미래가 됐다. 그리고 이제 내게 돌아오는 것은 뜻밖에도 '성적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108쪽)"



그리고 나이가 더 들어서 중년에 접어들면 멋진 신사가 되는 경우보다는 누추해지는 나를 마주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


 


"지난 금요일. 굉장히 기분이 묘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는데.... (아니, 20대에는 그랬지만 근 30년 만에) 내 몫의 냉면과 불고기가 나왔을 때 북적이는 가게에서 마침 옆자리의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 손님이 밀려 있는 통에 상을 치우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순간! 옆자리 손님이 남겨 놓은 고기를 내 몫으로 가져오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빠졌다.(94쪽)"


        


▲ 30년 만에 다시 온 유혹 냉면집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대목 ⓒ 출판사 핌


 


그렇지만 삶의 경험은 누추해진 나를 마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로 잔뼈가 굵은 저자는 위트와 유머로 당혹스러운 유혹을 무마한다.



"이것은 케네디가 쿠바로 항공모함을 보낼 때, 히틀러가 소련으로 군대를 보낼 때... 느꼈을 법한 강렬한 유혹과 갈등이었다. -중략- 나는 과연 못 말리는 배불뚝이 중년 철면피였다. (95쪽)"


 


시나리오 작가의 삶


2002년, 당시로서는 공전(空前)의 히트작이었던 영화, <공공의 적>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작가, 정윤섭은 결혼을 하고 아이의 아빠가 된다.


가사와 집필을 병행한 모양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아가가 막무가내 사춘기 청소년이 되도록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를 지켜준 것은 역시 사랑과 열정이었을터.


그는 아재라는 말의 의미에 녹아들어 있는 진부함 또는 비겁함과 처절하게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중년, 그는 결국 아재가 되고 말았다.


 


"우리 딸... 내 눈에는 한없이 예쁜 딸. 벌써 6학년... 언제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 우리 딸을 생각하고, 좋아하고, 사랑을 주면서, 죽음이 뭔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완성, 어떤 삶의 과정... 이런 것으로 가끔 느낀다. 그것이 내 생각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 사랑이, 정말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114쪽)"


       


▲ 사랑 1 저자는 딸을 키우며 삶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 출판사 핌


 


책을 읽으면서 <천공의 섬 아저씨>의 저자는 위트와 유머를 겸비한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그는 겸손과 배려를 잊지 않고 사람 냄새나게 사는 이웃집 아저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영화 제작 발표회 혹은 영화사 연말 회식자리 등에 참석했을 때 과연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생각해보십시오. 십중팔구 한쪽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다가, 술잔을 들고 바삐 자리를 옮겨 다니는 피디, 감독, 제작자들을 뒤로하고 살며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 불편한 자리 말고 시나리오 작가들이 모여서 편하게 한잔하는 자리가 있다면 어떨까.(194쪽)"



그는 매년 연초에 시나리오 작가들을 초대해 '시나리오 작가의 밤'을 5년째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책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부디 글을 쓰는 모든 분들의 건투를 빈다. 더불어 건강하시길! 그리고 내년에도 자신만의 산길을 뚜벅뚜벅 오르시길 빈다.(201쪽)"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영화라는 종합예술에 동원된 스마트한 인재들 중에서도 발군에 속하는 사람들로만 생각해온 터라.


밤하늘 한복판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별이 된 꿈을 잃지 않기 위해 열정과 투지를 불사르며 자신과 겨루고 있는 그들 모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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