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저만치 혼자서>
김훈의 글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그의 묘사는 가슴에 남아 요동친다. 상황만 담담히 전달하고 있는데도 슬프고 공포스럽고 우울하며 절망적이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가난한 사람과 여유가 있는 사람 할 것 없이 짙은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떠는 순간이 있다. 상황과 순간을 포착해 해체한 후 작가의 해석으로 살을 붙여 세상에 내놓은 소설, <저만치 혼자서>.
단편 소설을 모아놓은 <저만치 혼자서>는 그런 소설이다. 타인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타인들 속엔 나의 모습이 담겨있다.
- 간첩으로 몰려 고문당하고 징역살이를 해야했던 어부
- 흩어진 가족, 다시 만난 엄마와 아들의 모진 운명
- 9급 공무원이 되려고 찾아든 고시촌에서 몸누일 한평 공간을 구하지 못해 낯선 남자와 동거하는 영자
- 시들어 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쓸쓸하게 지켜보는 초로의 노인에게 첫사랑과의 추억조차도 종국엔 인간사의 비애로 남게 되는 이야기
- 박애와 헌신같은 인간사를 초월한 가치를 실천하다가 스러져가는 이름모를 늙은 신부와 수녀
이 소설의 제목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 중 "산에 / 산에 /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라는 구절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214쪽
법과 원칙이 무너진다. 도덕과 규범이 그 뒤를 따른다. 사회안전망은 찢기고 헤져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의 삶은 도탄에 빠진다. 와중에도 저마다의 삶은 계속된다.
김훈은 그 과정에서 산속에 홀로 피어있는 이름모를 꽃처럼 소외되고 격리된 삶을 관찰한다. 그 과정을 해체와 해석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저만치 혼자서>가 그런 소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