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에 빠지지 말 것

빨간 장갑과 스테이크

by 정태산이높다하되

B

“이 장갑 한번 껴 볼래요?”

파스타 주문을 받고 돌아서려는 B에게 손님이 한 돌발적인 질문이었다. 물론 중년의 여자 손님은 웃고 있었다.


“손님 장갑을요?”

“네, 오늘 처음 끼고 나와봤는데 아가씨한테 선물하고 싶어서요.”

빨간색이었다. 감침질로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어 세련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갑을 받아 든 B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자연스러운 주름으로 기품 있게 장식된 중년 여성의 웃는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이 와요. 날씨와 아가씨가 날 행복하게 해 줘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줘요.”

“그래도 갑자기 이러시면...”

“미안해요. 내가 엊그제 캐나다서 들어왔어요. 눈이 오니 기분이 좋아서 그만. 아가씨도 너무 맘에 들고~ 한 번밖에 안 껴봤어요. 그냥 어른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의외의 선물!

B는 중년 여인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수많은 사연들이 그녀의 얼굴에 스며든 결과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B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즐거움도 행복도 모두 남의 일로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갑은 마법의 장치라도 된 것처럼 그날 B가 일하는 내내 중년 여성의 미소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B는 사소한 선물을 통해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하고 재미있는 친구로 통하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일을 끝내고 레스토랑을 나와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의 밤거리를, 뽀드득 소리를 내며 걷던 B는 다짐했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 것’


B는 사소한 선물로 얼마간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유쾌하고 발랄한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선형으로 싸고도는 긍정의 힘이 그녀를 한껏 고양시켰다. 그 눈 내리던 날 낮에, B는 우연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B의 삶은 그날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중년 여성

레스토랑에 들어선 중년 여성은 서빙을 하는 젊은 여성, B를 발견하고 즉각 자신의 젊은 날을 소환해 냈다. 스스로 남루한 인생이라고 희망 없이 우울해하던 젊은 날의 자신을 말이다. 젊은 날 무작정 찾았던 캐나다의 몬트리올은 너무 추웠고, 몸서리치게 외로웠다.

절대 고독의 순간마다 한 번씩 찾던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파트타임 잡이라는 것을 했다. 밝은 표정으로 서빙을 하려고 노력했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매일 오전 신문을 보며 브런치를 먹던 할머니 손님이 어느 날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서면서 그녀에게 건넨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가씨가 몇 시에 일이 끝나는지 물어보니 5시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녁을 주문해 두었어요. 양송이 수프에다가 안심 스테이크 하고 샐러드를요. 기운 내요."


그녀는 할머니의 호의를 신기하게 여겼다. '아무리 웃고 있어도 나의 쓰라린 내면의 세계를 감출 수는 없었던건가!' 저녁을 먹는 내내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손님은 그날 이후 식당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간단한 인사말만 하던 사이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기도 했던 할머니 손님! 그 분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할머니가 브런치를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은 다른 손님을 통해 듣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알렉산드로 플루치노는 “행운과 우연은 과소평가되지만 실제로 개인의 성공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 손님의 호의 이후, 그녀는 모든 손님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그녀는 요식업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미술을 공부하던 그녀가 비즈니스로 성공한 것은 모두 그녀가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신문을 보며 브런치를 들던 할머니 손님 덕분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