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매일 독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태산이높다하되 Nov 11. 2021

여행의 이유

김영하

20여 년 전 어느 날, 나는 공항에서 탑승 예정 비행기를 놓치고 나서 보딩패스를 반납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공항에서 이런 역방향 절차를 경험한 승객이 얼마나 될까?


절차는 이렇다. 우선,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출국장 내 면세점에서 산 물품을 환불받는다. 둘째, 여권 검사를 받고 여권에 출국을 취소하는 도장을 받는다. 셋째, 출국장 밖으로 퇴출된다. 넷째, 공항 내 항공사 사무실을 찾아가서 티켓 값을 환불받는다.



사정은 이랬다. 여느 해외출장과 다름없이 나는 공항의 발권데스크에서 짐을 부치고 보딩패스를 받고 난 후, 남은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책을 꺼내 펼쳐 들었다. 탑승시간을  잘 못 알고 있던 나는, 시간에 임박해서 출국심사를 받을 요량으로 읽던 책에 몰입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에 도착하니 승무원들이 나를 알아보고 혀를 끌끌거리고 있었다. 비행기는 나를 찾느라 30분 이상 출발이 지연되었다고 했다. 출국장에만 들어가 있었어도 그들은 나를 찾아냈을 것이다.


이상이 상하이의 푸동 공항에서 추방당한 김영하의 에피소드를 읽다가 생각난 나의 과거 에피소드다.



대학시절 야학교사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검정고시생들에게는 봄, 가을 두 번의 응시기회가 주어진다.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던 당시의 학생들이 응시를 위한 접수를 하려면 다닌 학교의 졸업증명서나 중퇴 증명서가 필요하다. 야학생들을 대신해 이 서류를 떼기 위해 그들이 졸업한 학교를 일일이 돌아다닌 경험이 있다.


그때 갔던 곳이 충북의 청풍면, 경주의 건천면, 전남 광주의 작은 촌, 변산의 해변 근처 등지에 있던 초중학교들이었다. 기차와 버스를 타고 사나흘 동안 혼자서 일종의 출장을 갔던 것인데, 지나고보니 그것이 여행이기도 했던 것 이다.


농촌과 어촌 마을에 있던 학교의 행정실이나 교무실에서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시던 분들의 순박한 미소를 기억한다. '자기 공부도 바쁜 대학생이 좋은 일 한다'며 칭찬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소도시나 시골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아 상경한 야학생들의 신산했을 살벌한 공장생활, 그리고 그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그들의 결심을 생각하니, '봉사'운운하며 그들을 가르친다고 우쭐대던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이란 챕터에서 김영하는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97쪽)"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 말은 잊고 있던 공항에서의 있을 수 없는 에피소드와 야학시절의 출장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그 여행 또는 출장은 내 삶의 자양분으로 쓰였을 거라고 믿는다.


학업을 마치고 취직한 무역회사에서 해외출장이 잦았다. 그런데 수많은 나라의 여러 지역들을 다니면서 한 번도 출장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업무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일정과 경로가 나의 의지와는 별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행은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여행의 이유>를 읽다 보니 출장도 여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출장을 가면 혼자 있는 시간이 평소보다 많게 된다. 책을 읽게 되고, 여유를 가지고 생각이라 것도 차분히 해보게 된다.


무엇보다 나를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출장 또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현실의 나와 다시 만나게 된다. 저자 김영하는 그 상황을 전쟁터에서 귀환한 오디세우스의 감정에 이입하며 "페넬로페의 침대에 누운 오디세우스는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132쪽)"

오디세우스, 위키백과

시오노 나나미가 유럽을 디자인했다고 격찬해 마지않은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는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명언을 남겼다. 무려 10여 년에 걸친, 인생에서 중요한 시절을 그는 갈리아 땅을 정복하기 위해 늘 출장 중이었다.


카이사르 또한 이러한 여행 또는 출장을 통해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을 발견하며 경이로워하지 않았을까. 그는 죽이거나 갈아치우고 없애는 정복이 아닌 대부분의 갈리아인들을 길들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지역과 사람들을 로마화 했다.


20여 년 전 그날 출국장을 거슬러서 밖으로 퇴출된, 다시 말하자면 급하게 재입국된 지 두 시간여 만에 같은 목적지로 출발하는 루프트한자의 왕복 티켓을 사서 부랴부랴 출국 수속을 마치고 탑승 게이트 앞으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갔다.


탑승 후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그 비행이 출장이라는 업무를 위한 행위라는 사실을 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출발이라고 믿으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4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