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의 3퍼센트는 소금
L은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J에게 겨울 용 모직 재킷을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나한테 좀 작은데 네가 입어볼래?”
“그래? 왠 재킷이야?" 입어본다. "잘 맞네. 근데 이거 새것 같은데...”
“잘 됐네 그럼 너 입어라.”
때는 20여년 전 대학졸업을 앞둔 무렵이었다.
J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재킷을 받아 입었다. 마침 필요했던 종류의 옷이었다. 취업 면접에 갈 때나 특별한 날에 입을만한 재킷 말이다. 그렇게 그 재킷은 그의 젊은 날의 겨울이면 늘 함께 하게 된다.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삼십 대를 넘기고 사십 대를 맞이한 J는, 어느 날 문득 그 재킷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딜 가나 늘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자신과 함께.
마흔 중반의 나이에 갑자기 L과의 사연이 생각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J의 아내가 아이들과 처가에 간 틈에 그가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 부모님 댁에 갔던 날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그날 우연히 아직도 부모님이 사용하는 장롱 구석에 예의 그 체크무늬 재킷이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J의 무의식의 심연에는 그 당시 친구의 호의가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떠올리면서, J는 오래 전 친구의 선물과 배려를 소환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우여곡절을 겪는 순간을 넘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저절로 검토의 경로를 밟게 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의 선의가 떠올랐다는 사실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J는 20여 년 전의 L로 빙의해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L은 변변한 외투 하나가 없던 J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거다. 그는 큰 맘을 먹고 자신이 모아둔 용돈으로 재킷을 한벌 구입한다. 고급스러운 체크무늬 재킷이라면, 90년대 중반이라는 시절을 고려해 볼 때 백화점이 아니면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다른 친구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구입해 보관해 두었던 고가의 옷을, 우연을 가장해 전달한다. 친구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무심한 듯 사이즈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친구의 섬세한 배려를 뒤늦게 발견한 J의 가슴은 먹먹해졌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모르게 티 내지 않고 큰 선물을 한 친구에게 J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치기와 자존심이 속으로 그저 속으로만 고마움을 뇌도록 했을뿐이었다.
중년의 J는 재킷을 발견한 그 해 연말 술자리에서 L을 와락 껴안고 흐느껴 우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얘가 사업을 하더니 요즘 스트레스가 많은 모양이네. 술이 많이 취했나 보다. 얘들아 가자 그만." 하면서 웃던 L은 J에게 한마디 보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술값은 네가 낼 거지?” 이심전심, L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J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속담,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3퍼센트의 소금 때문’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J는 미소지었다. 소금, L을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