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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Nov 29. 2021

요동정벌 vs 과전법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개국)

107쪽

고려말, 조선 건국 9년 전, 함경남도 함주라는 지역으로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면서 역성혁명의 단초를 마련한다. 망국은 결국, 땅 문제로 봐야 한다.


고려말 권문세족과 사찰의 토지 점유는 상상을 초월한다. 최소 수십만 평 씩 땅을 소유하고 있던 그들은 경쟁적으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았고, 심지어 귀족들의 종들까지도 횡포를 부리고 다녔지만, 고을의 수령들조차 통제하지 못했을 정도다.


부의 편중

무신들의 쿠데타로 장악한 최 씨 정권 100년, 그리고 이어진 원나라 강점기 100년은 고려의 멸망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이른바 '부원배'라고 불린 원나라에 기생해 부귀영화를 누린 귀족들이 농사지을 수 있는 토지는 모두 점령해 버린 것이다.


공민왕과 신돈

부의 재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충숙왕의 차남이었던 공민왕은 왕자 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10년을 살았지만 고려의 왕이 되자마자 원나라식 변발과 복제를 폐지하고, 전횡을 일삼던 원의 기황후 동생 기철을 처단했으며, 동북면의 이자춘 이성계 부자를 등용해 원이 지배하고 있던 쌍성총관부를 탈환한다. 원이 점령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공민왕은 권문세족으로부터 토지를 빼앗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그것은 승려, 신돈에게 전권을 주는 것이었다. 신돈은 농민들로부터 빼앗은 땅을 일정 기간 내 돌려주도록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과거제를 개혁했다. 그리고 신돈은 권문세족의 대항마로, 새로운 정치세력, 목은 이색을 필두로 한 그의 제자들 즉,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권근, 윤소종 등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러나 한낱 승려에 불과했던 신돈은 권문세족들에게도 적이었지만, 숭유억불 사상으로 무장된 신진사대부들로부터도 지지를 받기 어려운 운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결국, 모함을 받게 되고 목이 달아난다. 개혁은 실패하고, 공민왕은 방황하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다. 난잡한 생활 중 자제위 젊은이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국제정세

고려 주변 정세는 어지러웠다. 원나라는 기울고, 주원장이 세운 나라, 명이 흥하고 있었으며, 남쪽에서는 왜의 침략이 자심했다. 이런 와중에 부원배들인 권문세족들은 국운이 다해 북쪽으로 밀려난 북원을 따르고, 위협적 세력으로 떠오르는 명을 배척한다. 기득권층들이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는 이유는 역시 땅 때문이다. 소유하고 있는 땅을 지키려면, 새로운 세력이 제시하는 정책이 아무리 합리적이더라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때 신진사대부인 정몽주와 정도전이 친명반원 정책을 주장하다 귀양을 가게 된다. 바로 복권된 정몽주와는 달리, 모친이 여종 출신이었던 데다 정권 실세들에게 비타협적이었던 정도전은 유배생활은 면하지만, 수도 개경으로 입경하지는 못하는, 지금으로 비유해 말하자면 무기한 피선거권 제한 조치를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정도전은 삼봉재라는 서당을 운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기로 하지만 그마저도 지역유지들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한다. 북한산 자락과 부평, 그리고 김포 등지에서 자신의 서당이 모두 폐쇄되는 경험을 하고 나서 정도전은 고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실감한다.


최영 vs 주원장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생각 없이 되는대로 살다가 노구의 최영장군이 거듭 충언을 하자 철이 든다. 그는 72세의 노장, 최영과 손잡고 권문세족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최영이 손잡은 무장이 바로 이성계다. 최영은 시중, 이성계는 수시중이 되어 둘은 일약 정계의 실력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둘은 함께 길을 가기엔 너무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최영은 선친의 유언,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를 실천한 청렴결백한, 다른 말로 고지식한 인물이었지만, 이성계는 황금을 황금으로 보는 인물이었다.

136쪽


명의 주원장이 고려가 원으로부터 탈환한 쌍성총관부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자, 최영과 이성계의 갈등은 시작된다. 최영은 요동정벌을 주장했고, 이성계는 우리 국사책에 나오는 4 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에 반대했다.


한가람 역사연구소장, 이덕일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백전노장 최영은 이미 원나라의 요청으로 전투에 여러 번 참전해 오랜 기간 중국 곳곳을 누빈 경험이 있는 상승장군이었다고 한다. 최영은, 고아출신으로 중, 목동, 건달로 살아가던 주원장의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최영은 중국 내 여러 부족들의 권력관계에 정통해 있었다는 것이다. 최영과 이성계가 힘을 합쳐서 동원한 군사 4만이면 북원과 중국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이 주원장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다. 한마디로 요동정벌은 불가능한 헛꿈이 아니었다는 분석이다.


위화도 회군

하지만, 어리석었던 우왕은 최영에게 자신을 지켜달라며 애원했다. 최영은 왕의 부탁을 들어준다. 도성에 남은 것이다. 이성계를 믿고 친원파인 조민수를 함께 보낸다. 위화도 회군이 실행된 배경이다. 이성계는 최영을 처단하고 우왕을 몰아낸다.  아들 창왕이 잠시 보위를 잇지만  고려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공양왕으로 교체된다.


그리고 1391년 1월, 정도전은 새로운 토지대장을 작성한다. 같은 해 9월 고려의 수도, 개경 거리에서는 옛 토지대장이 불태워졌다.


1392년 7월 16일, 왕 씨를 끌어내리고 이성계가 왕으로 옹립된다. 이튿날 그는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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