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외
과외
학창시절 내 별명은 힘없이, 땡순이였다. 매번 힘없이 다닌다고 힘없이, 그리고 수업을 마치면 땡~ 하고 집에 간다고 땡순이. 내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중1 아이들에게 과외를 했기 때문이다. 남자아이 3명에 여자아이 2명, 학원을 운영하던 큰언니가 만들어준 그룹과외였다. 생각해 보면 좀 우습다.
내 나이 19살, 그 아이들은 14살, 그다지 차이도 나지 않는 나이에, 앞가림도 못하던 내가 그 애들에게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으며 무언가를 가르친다니, 오히려 내가 그 애들에게 더 많이 배우지 않았을까.
꽤 오래 그 과외를 했었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그 중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짝사랑해서 수업 시간에 울었던 것, 중간고사가 끝났다고 그 애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여 주러 간 것 등이다. 늦은 저녁, 유치부와 초등부의 수업이 끝나고 어둠이 깔리던 그 시간, 헐레벌떡 뛰어온 나와, 다섯 아이들이 생각난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지나 근 3년 가까이를 만났던 아이들이다.
대학 친구들은 과외비를 받는 날이면 한 턱 내라고 했지만, 그 과외비가 내 용돈의 전부였다.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차비를 하고 점심을 사 먹으면 빠듯하다 못해 모자라는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막내 형부가 매번 용돈을 챙겨주셔서, 그 돈으로 책을 사고 친구들에게 쓴 소주 한 잔을 살 수 있었다.
학교에선 가끔 강사실을 청소하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몇 몇 여자애들이 옷차림이며 하고 다니는 걸 보니 형편이 어려운가 보다는 뒷말이 돌았다. 가난하다기 보단 센스가 없었을 뿐인데, “나름 신경 써서 입은 건데”라며 언니에게 별 뜻 없이 하소연을 했다. 그랬더니 막내언니는 내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바지며 셔츠를 사줬다.
아직도 그 옷들이 기억난다. 등판에 커다랗게 상표가 박힌 옷으로만 사줬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상표는 우리언니의 경고였다.
“내 동생 건드리지 마라! 죽는다.”
나름 시험기간이면 예상문제를 만들고, 보강을 하며 성적을 올려 주고 싶어 했던 그 때, 아이들이 정작 듣고 싶어한 건 대학의 로망과 연애였는데, 해 줄 말이 없었다. 대학가면 좋은 날이 올 거라며 이야기했지만,
좋은 날이란 게 도대체 뭔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