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IMF와 취업
IMF
IMF, 기업들이 모셔간다던 선배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모두들 공무원 준비를 시작하거나, 헐값에 팔려나갔다. 여전히 IMF의 폐허와 뭉개진 삶들이 널린 그 현실위에서 나는 소꿉장난 같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동화는 언제나 “결혼 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그래서일까. 결혼하고 나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줄 알았다. 그랬다. 실제로 그 시절의 내겐 기억이 없다. 어떤 노래가 유행했고, 어떤 드라마가 히트였는지, 남편도 나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 또한 조금의 여유도 사치 같았다.
직장도 부모도 모두가 처음이었던 그 시절, 삶의 무게가 상처 같았다. 30대의 내 부모가 오남매를 지키려 어떻게 살아왔을지 그 막막함을 조금이나마 느끼면서,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은 사라졌다. 대신 내가 부모님께 준 상처가 부메랑이 되어, 내 마음을 할퀴었다.
취업
노동부에 출근했다. 24살 첫 출근을 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정말 바쁜 날들이었다. 정신없이 업무를 배우며 민원인들을 상대했으며, 실수투성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분이 화가 잔뜩 난 채 서 있었다. 실업급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며 삿대질을 하고 화를 내셨다. 커다란 고함소리와 화가 난 눈빛, 너무 무서웠다. 결국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코까지 들이마시며 펑펑 우는 24살의 새내기 직장인. 민원인 또한 당황해서 그런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 동기들은 코 들이마시는 흉내를 내며 나를 놀렸다. 그렇지만 그 일은 내게 큰 상처다. 울고 싶은 사람 앞에서 울어 버린 그 날이 너무 부끄럽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앞에서, 일을 하고 싶으나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파랗게 어린 담당자에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분의 황망함이, 내가 그 분의 나이쯤 되고 나니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분뿐만이 아니다.
아직 어려 삶이 무엇인지 가장이 무엇인지 몰랐던 그 시절, 내가 어쩌면 무례했을지도 혹은 어쩌면 너무 냉담했을지도, 혹은 근무 후의 데이트에 설레어 성의 없었을지도 몰랐을 그 시절, 나를 만났던 그 수많은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죄송합니다. 미숙했던 나를 용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