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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호랑이 Feb 02. 2021

6.40대 쓰고 싶은 이야기

4) 세 친구


세 친구           

  미술시간이었다.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이가 숨기고 싶어 하는 비밀이 반 아이들 사이에서 회자되었고,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하필 내 옆자리다. 잘 모르는 아이, 거기다 울고 있는 아이, 어떻게 해야 하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

“웅.” 

울고 있는 아이의 대답에 

“사람이 살았거든?”

“웅.”

“그런데 죽었대.” 

정말 한심한 이야기다.

  그런데 울고 있던 아이가 웃었다. 그 아이는 농담이 아니라 이 눈물을 멈출 계기가 필요했던 거다. 울고 있던 그 아이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머리숱 많은 착한 친구. 환불도 못 받고, 본인이 흘린 돈도 오해받을까 못 줍는 나만큼 소심한 친구.      


고등학교 입학 준비물 중 하나가 영어사전이었다. 집 근처 서점에 들러 두꺼운 영어사전을 고르는 데 자그맣고 예쁘장한 아이가 말을 걸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집도 가까웠다. 아침에 만나서 같이 가자며 웃으며 헤어졌다.

  낯선 아이와 아침에 학교를 같이 가야 한다니, 부담스러움에 저녁부터 입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린 같이 등교를 하고 하교를 했다. 어떤 날엔 츄파춥스를 물고, 어떤 날엔 아이스 바를 물며, 그 아이가 슈퍼 집 아이라서 더 좋았던 건 절대 아니다. 먼저 말 걸어주고 예쁘게 웃던 친구.


  또 한 명은 친구의 친구였다. 그렇게 알게 된 사이인데, 소개해준 친구와는 멀어졌고, 친구의 친구만 내 곁에 남았다. 진솔하고 씩씩하다. 그림을 잘 그렸다. 꿈이 만화가였던 친구, 힘도 세지만 마음도 강한 친구, 누구보다 따뜻하다.


  거의 30년의 세월을 같이 한 친구들이다. 버스를 타고 주책스럽게 잘 생긴 옆 동네 남학생을 훔쳐 보기도 했고, 성인이 되어선 돈이 없어서 소금을 안주삼아 소주 먹던 친구들.

그 시절엔 세상이 우리를 배신했고, 사랑은 언제나 뒷모습만 보여줬다. 우린 언제나 순수할 거라 믿었고, 변함없이 6펜스대신 달을 택하리라 호기롭게 외쳤다. 

  그런 친구들이 직장생활에 지쳐 매번 개, 소 , 닭을 찾으며 상사들을 씹었다. 양다리 그 놈과 싸가지 없는 동기들과 너무나 허전한 월급봉투에 이럴 수는 없다면서 사회의 정의는 사라졌다 투덜거렸다. 

  결혼하고는 우리는 더 전투적이 되었다. 명절 근처면 전투태세였고, 명절이 지나면 전쟁후유증으로 따라오는, 우울증과 자괴감에 힘들어 했다. 무시당하고 학대당해 패잔병으로 돌아 온 우리들은, 백화점 매대의 누워있는 옷이라도 하나 사 입으며 서로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곤 했다.

  그리곤 엄마가 된 우리들. 백화점 매대에 누워 있는 옷도 사치였다. 남편의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아이를 포대기에 업은 채, 생사만 확인하며 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 컸을 때 만난 우리들에게, 우리는 없었다. 

무슨 이유식이 좋은지, 어떤 장난감이 인기가 있는지, 예전 우리의 객기는 사라지고 기미가 낀 피곤한 엄마들이 있을 뿐. 

  아이를 맡기고 워킹맘이 되면서는 그나마 더 만나기 힘들어진 우리들.


그렇지만 우린 같은 시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전쟁을 치룬 그래서 공감하고 서로를 안쓰러워하는 더 찐한 전우애를 가지게 되었다. 치열한 육아의 포탄과 시댁의 핵폭탄에도, 우린 마치 자살특공대처럼 용감하게 그 포화속을 뚫고 살아 남았다. 남의 편들은 보급조차 원활히 하지 못했고, 통신병의 의무도 오히려 왜곡과 난처한 통역질로 전쟁을 더 험하게 몰아 갈 뿐이다. 우린 각자의 전쟁에서 온전히 살아남았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지만 남은 건 뭐지? 무너진 자존감과 너덜너덜해진 육신? 살아남았을 뿐이지 이긴 것도 아닌 전쟁. 

지금은 전 세계를 덮친 역병으로 휴전상태지만, 언제 어디서 다시 시작될 지 모르는 전쟁에 마음은 전시상태다. 

  그럼에도 삶의 8할쯤은 행복한 이유엔, 이 친구들의 지분이 있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학창 시절 거의 매주 만나 주머니 탈탈 털어 쓴 소주 마시던 친구들, 서로의 치부와 연애 사를 모두 알고 있다. 거기다 우린 방귀도 튼 사이다. 하하하 그러니 우린 죽을 때까지 가야 한다. 배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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