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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호랑이 Mar 13. 2021

8. 행복을 주워가며

잘 늙어가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의 생활계획표는 빡빡했다. 

빈틈은 불안했다. 지켜지지 않는다 해도 최대한 촘촘하게, 그런 삶이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빈 공간은 나태함의 표식이었다. 지키지 않으면서 멍 때리면서 마음 한 귀퉁이는 불편해, 이건 쉬는 것도 아니고 뭣도 아닌 시간들. 

  결국 오히려 빈 공간이 더 늘어만 갔다. 빈 공간이 늘어날수록 빈틈은 더 많아졌고, 불안함과 초조함에 우울감만 늘었다. 산책도 규모 있게, 계획적으로, 삶에 우연도 일탈도 안 돼. 

마음은 모가 나고, 머리에는 쥐가 나고, 내 주변엔 즐거움보단 짜증만, 그리고 좋지 않은 결과들만 늘어났다. 그렇게 지쳤을 때 느림에 대한 책들을 접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왜 그냥 좀 가만히 평온하게 있음에 죄책감을 느끼는가. 매번 빨리 빨리, 일번부터 줄 세우기, 일등이 선이 되는 세상 속에서 혹시 도태되진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이젠, 느리게 걸어 꼴찌가 되면 어떤가. 느리게 걸으며 주변을 보고, 향기도 맡으며, 하늘도 보며 천천히 가슴에 행복함을 담고 걷는 길. 줄 세우지 않고 걷는 길.

빠른 삶이, 무엇이 되어 명함을 가져야 하는 삶이 이 세상의 값어치라면, 나는 조금 다른 길로 가겠다. 나는 이제 무엇이 아닌 되는대로 살고 싶다.     


  편하게 멍하게. 

내 시간표에 빈칸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 와서 그 빈칸에 쉼표를 찍든, 마침표를 찍든, 작은 풀꽃 하나를 그리든 그건 중요치 않다. 내 여백이, 내 빈칸이 받아 줄 테니, 쉼표를 찍는다면 같이 쉬어주고, 풀꽃을 그려준다면 어울리는 하늘과 구름을 그려 줄 테니.      


  그렇게 천천히 행복을 주워 가며, 잘 늙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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