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보고 싶다는 말로는 부족한
아직 바람이 많이 매서웠다. 코로나로 인해 평범했던 일상들이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
2020년 3월 30일의 밤, 그 날도 바람이 매서웠다. 처음엔 장난처럼 느껴졌다. 파티마 병원 응급실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넋이 나간 듯 그저 아닐 거야란 생각만 했다. 담당의사에게 관계자에게, 60년 넘게 같이 산 엄마는 아빠를 한 번 봐야하지 않겠냐며 언니가 울먹이며 호소하고 있었다.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별할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버진 재작년에 위암수술을 받으셨고, 부작용을 겪긴 했지만, 앞으로 10년은 더 거뜬하실 거라 믿었다. 아니, 죽음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해 본적도 없었다. 저렇게 다섯 남매에 아홉 명의 손자들에 아내 얼굴조차 못 본 채 홀로 떠나실 분이 아니다.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실 거다. 이건 그냥 해프닝이라고 믿었다.
눈물을 보이면 의사 선생님의 그 무서운 말들이 사실이 되어버릴까, 이를 악물었다. 끝도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거 같았다.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아닐 거란 생각만 했다.
그러다 아버지 얼굴을 뵀다. 아기 같았다. 여전히 맑고 고왔다. 눈만 뜨면 되는데, 아버지 눈만 뜨면 되는데, 제발 눈을 뜨시라고 속으로 수십 번을 외쳤다. 아무도 오지 못하는 장례식장에서, 가족들만 덩그러니 꾸역꾸역 밥을 먹으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실감도 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울고 있어도 우는 줄도 몰랐다.
길을 걷다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꽃을 봐도 눈물이 났다. 아직도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면 눈물부터 난다.
서정주님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지만, 나에겐 그 팔 할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닮은 성격과 모습, 취향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아버지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나는 나이가 들면 슬픔도 늙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속엔 여전히 10대와 20대와 30대가 있고, 그 시절을 같이 한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 그 곳의 달도 아름답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