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셨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공부를 하셨다. 아침이면 도시락과 차비를 작은어머니께서 주셨다고 한다. 그러면 그 차비를 모아 친구들과 영화를 보셨다고 한다.
어렵던 시절, 친척집이지만 맛있는 반찬조차 맘대로 젓가락질하기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셨다. 먹고 사는 문제 대신,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현실의 짐을 벗어놓으셨으리라.
특히 아버지는『007』영화를 좋아하셨다. ‘숀 코네리’부터 ‘로저 무어’까지, 그 특유의 시작 음악이 들리면서 건 배럴 씬이 시작되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살인면허를 가지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미녀들과 어울리는 제임스 본드가 아버지의 꿈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아버지의 모습은 제임스 본드와 정반대에 가깝다. 즉흥적이지도 않으시며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어릴 적 토요일 밤이면 가족들은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보던 그 시간이 좋았다.
월급날도 신나는 날이었다. 누런 봉투에 담긴 아버지의 월급에서 딸그랑 하는 동전 소리가 나면 더 신났다. 아버지는 월급봉투의 동전들을 나눠 주셨다. 어떨 때는 900원이나 있어 엄마가 눈을 흘기기도 했고, 어떤 때는 100원도 되지 못해 속상하기도 했다.
또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셨다. 은퇴 후에는 서예와 책 읽기로 소일을 삼으셨다. 다이어리에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도 취미 중 하나셨다. 그래서 아버지 생신엔 손자손녀들이 꼭 책을 선물하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기뻐하시면서 그 책들에 줄도 긋고 메모도 하시며 열심히 읽으셨다.
그 덕분인지 나 또한 책과 영화를 좋아하며 자랐다. 힘들거나 어려울 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만, 영화나 책 속의 말없는 동지들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 삶에서 든든한 동지 둘을,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나만이 저금할 수 있는 재산을 물려주셨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돈도 들지 않는 저금통장엔, 소중한 책들과 영화를 통해 배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문제는 나이가 드니 비밀번호를 깜박 깜박한다. 그래서 입금도 인출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