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바람이 느릿하게 산허리를 감싸고, 나뭇잎이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계절이다. 햇살이 가지 끝에 닿을 때마다 부서지는 빛이 길 위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천천히 걷는 이의 발끝에서 낙엽이 속삭이고, 그 소리마저도 조용히 마음을 어루만진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시간과는 다른 리듬이 흐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는 오래된 나무와 돌담이 수백 년의 이야기를 품고 여행자를 맞이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는 백제 성왕 시절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세우며 시작된 천오백 년 역사의 고찰이다.
신라 경문왕 대에는 도선국사가 선종의 맥을 잇는 선암사를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 너머 서쪽에는 송광사가, 그 맞은편에는 이 고요한 사찰이 마주 보듯 자리하고 있다.
절로 오르는 길에는 수령 수백 년의 상수리나무와 동백, 단풍나무가 하늘을 덮는다. 가을이면 숲은 붉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마치 자연이 그린 한 폭의 수묵화 속을 걷는 듯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수정 같은 계곡물이 돌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고, 그 위에 걸린 아치형의 승선교는 오랜 세월에도 변치 않는 자태로 여행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보물로 지정된 이 다리는 받침대가 암반 위에 놓여 더욱 견고하며, 다리 중앙에 새겨진 용머리가 신비로운 기운을 전한다.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또한 눈길을 끈다. 고려시대의 장인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석탑은 단아하면서도 묵직한 기품을 지닌다.
선암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로 등 다수의 문화재를 품은 사찰로, 전통 불교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선암사 왼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7미터 높이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래로는 800년을 이어온 자생 차밭이 펼쳐져 있다.
햇살보다 그늘이 더 많은 곳, 삼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음지에서 자란 차나무들은 고요한 산사의 기운을 머금는다.
운무와 습기가 어우러진 환경 덕분에 찻잎은 부드럽고 향은 깊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선암사 야생차는 ‘구수하고 깊은 맛’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양이 적어 귀하게 대접받는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그래서 선암사를 찾는 이들은 찻잎 한 잔에도 오래된 세월의 여운을 느낀다.
또한 선암사 칠전선원은 태고종의 중심 수도 도량으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과 참선을 이어가는 장소다. 이름 그대로 일곱 채의 건물이 모인 이 선원에서는 불빛 하나조차도 조용히 깜빡인다.
사찰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는 도시의 소음을 잊게 만들며, 이곳의 공기는 묵상과 평온으로 가득 차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선암사 입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 불리는 승선교와 함께 강선루가 맞이한다. 담장 너머 백매화와 홍매화는 각각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봄이면 향기로 사찰을 가득 채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불교문화를 담은 금동관음보살상, 향로 등 2천여 점의 유물이 선암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어, 이곳은 단순한 산책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의 현장이 된다.
2018년, 선암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역사적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명성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은 이곳의 ‘조용한 울림’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남 순천 선암사)
선암사의 해우소가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로 불릴 만큼 세심한 조화를 이루듯, 모든 공간은 자연과 사람의 경계를 허문 듯 평화롭다.
가을의 선암사는 붉은 단풍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바람은 향긋한 찻잎 냄새를 머금는다. 천천히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잠시 멈춰 서면 오래된 시간의 숨결이 들린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 속에서 가을은 더욱 깊어지고, 그 속을 걷는 이의 마음도 함께 물든다. 선암사, 그곳은 단풍보다 더 깊은 고요의 색을 지닌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