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북 고창 선운사 가을 단풍 풍경)
가을빛이 산허리를 타고 내려앉는 계절이면, 도솔산의 품은 고요하게 물든다. 돌계단 사이로 스미는 낙엽의 빛, 바람에 흩날리는 단풍의 향기가 사찰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한결 느리게 만든다.
산문 앞에 다다르면, 붉고 노란 물결이 마치 누군가의 오래된 기억처럼 사방을 감싼다. 그 길 끝에서 마주하는 한 사찰, 세월의 결을 간직한 선운사다.
붉은 단풍잎 아래 묵묵히 서 있는 절의 모습은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고,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깊이 마음을 적신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북 고창 선운사 가을 단풍 풍경)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에 자리한 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도솔산의 북쪽 기슭에 터를 잡고 있다.
도솔산은 선운산이라고도 불리며, 조선 후기에는 80여 개의 암자와 100개가 넘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 규모만으로도 한때 이곳이 얼마나 융성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로, 불교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전통의 터전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북 고창 선운사 가을 단풍 풍경)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의 진흥왕이 노년에 이곳에서 미륵삼존불의 꿈을 꾸고 절을 세웠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때 고승 검단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검단 스님의 창건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검단 스님은 용이 살던 큰 못을 메우며 절의 터를 다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마을에 돌았던 눈병이 이 못의 흙과 숯을 쓰면 낫는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돌과 숯을 가져와 함께 메워 절의 자리를 완성했다 한다.
‘선운(禪雲)’이란 이름은 구름 속에서 선정의 경지를 닦는다는 뜻으로, 스님이 지은 법명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북 고창 선운사 가을 단풍 풍경)
선운사는 어느 계절에 찾아도 운치가 있지만, 가을이면 그 아름다움이 정점에 이른다. 절로 향하는 길목마다 단풍이 고운 색을 입고, 계곡물에 비친 산 그림자는 붉은빛과 황금빛이 뒤섞여 깊은 물감을 풀어낸다.
사찰을 감싸는 도솔산의 숲은 평탄한 길이 이어져 있어 걷기에도 부담이 없다. 덕분에 트래킹을 즐기는 여행객뿐 아니라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특히 대웅전 뒤편의 동백나무 숲은 이곳의 또 다른 자랑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서 있으며, 봄이면 붉은 동백꽃이 절 뒤편을 병풍처럼 수놓는다.
가을 단풍이 지나고 겨울 눈발이 내릴 무렵, 동백은 다시 붉은 꽃을 피워 선운사의 계절을 이어준다. 이 장관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봄 열리는 ‘동백연예술제’는 지역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북 고창 선운사 가을 단풍 풍경)
가을의 선운사는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좋은 한적한 여행지다. 사찰 주변은 완만한 경사로가 이어져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휠체어나 유모차 이용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으며, 주차장과 화장실 등 관광 인프라 역시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
덕분에 ‘걷기 좋은 사찰 여행지’로 손꼽히며, 단풍철이면 사진 애호가들의 발길이 잦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북 고창 선운사 가을 단풍 풍경)
참배를 마친 이들은 도솔암 마애불과 진흥굴, 장사송, 참당암 등을 잇는 산책 코스를 따라 여유로운 산행을 즐긴다.
단풍잎이 쌓인 오솔길을 걸으며, 천년 세월을 품은 사찰의 정취를 느끼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차분해진다. 많은 이들이 “가을엔 꼭 선운사의 단풍을 보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운사의 가을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붉은빛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과 종소리, 고즈넉한 산사의 향기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문다.
한 폭의 수묵화처럼, 조용하지만 선명한 색으로 마음을 물들이는 곳. 올가을, 천년의 세월을 품은 도솔산 아래서 붉게 타오르는 단풍의 장관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