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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작 Jul 09. 2024

02화. 여유가 불안한 이유

불안의 근원

올해 첫째 아이가 10살, 둘째 아이가 7살이 되면서 금쪽같은 여유가 생겼다.

둘째 아이가 올해 일곱 살이 되면서 혼자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면서 나에게도 아주 약간의 금쪽같은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훗.


그러나 10년간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오던 내게 이 여유는 좋기도 했지만  나에게 또 다른 불안감을 일으켰다. 나에게 이런 금쪽같은 여유는 불안하고 죄책감마저 안겨주기도 한다.


정말 걱정도 팔자고 성격이 팔자라더니 내가 딱 그 경우이다.


나의 하루 일과를 읊어보자면 새벽  5시 기상. 스터디카페에서 두 시간 청소. 아침시간을 이용해 30분간 첫째 학습지를 봐주고 출근. 9시-6시 본 업무. 점심시간 블로그 포스팅 알바. 오후 7시-8시 요가. 8시-10시 아이들 숙제 봐주기,  책 읽어주기. 하루 끝. 주말 새벽 1시-아침 9시 쿠팡알바.


누가 보더라도 헉 소리가 나는 스케줄인 만큼 이 정도는 해줘야 밤에 지쳐 쓰러져 잠들 수 있다. 자는 게 아니라. 지쳐 쓰러져 잠들어야 잘 수 있는 삶이다.


그럼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고?

언제부터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된 건 이십 대 때부터인 것 같다.


부모님의 외도와 잦은 가출, 그리고 이혼으로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적이지 못했던 나는 차비가 없어서 추운 겨울 함박눈이 내리던 날 차비조차 없어 지하철로 서너 정거장인 거리를 두 시간이나 걸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 이렇게 몇 번 해보니 경제적 어려움이 두려워서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던 것 같다.


새벽 4시 반에 동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학교를 가고 학교가 끝나면 또 알바를 하고 주말에도 알바를 했다. 엠티, 오티, 여행, 뒤풀이 등 알바 외에는 뭔가를 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별명은 알바천국.


이런 패턴으로 살아와 몸이 편하면 잠들 수 없는 나에게 생긴 금쪽같은 여유.

10년간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 여유인가. 하지만  역시나 이 짧은 여유가 불편하고 오버스럽게도 죄책감이 든다.


내가 이렇게 편해도 괜찮은가? 이러다가 또 어느 순간 이전처럼 막 가난해질 것 같고 내 삶에 불행이 몰려들 것 같은 불안함이 나를 잠식한다. 괴롭다. 난 대체 왜 이러는가. 마치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몸이 힘들거나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하지 않으면 불행해질까 봐 왜 겁이 나는 건데?

 

견디기 힘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혼자 잘 놀고 있는 둘째 아이를 불러 책을 읽어주고, 학습지를 시키고 첫째 아이 옆에 가서 굳이 숙제를 참견한다.


그러나 내 몸이 힘들고 지치니 아이가 기대만큼 못 따라와 주면 화도 나고 짜증이 난다. 애꿎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때론 화도 내며 또다시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치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깊게 든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이런 내 모습에서 또 나의 엄마의 모습을 본다. 부부싸움 후 언니와 나에게 화풀이를 하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학교만 겨우 보내면서도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며 성적표를 들고 화내고 윽박지르고 때리던  우리 부모님.


 엄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 언급해 보자면 엄마는 부잣집 과수원집 막내딸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풍족하게 살았지만  직업도 없고 시골 깡촌에서 9남매 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딱히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도박꾼 아버지 밑에서 매를 맞고 자란 아빠를 만나서 맘고생을 엄청 하며 살아왔다.


이런 부모님 사이에서 자라난 두 살 차이의 언니와 나의 어린 시절이 어땠겠는가.

내가 짜증이 많은 이유는 뱃속에서부터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태아 때부터 얼마나 불안했을까. 가끔 내가 가엾게 생각될 때가 있다.


2년 터울로 딸 둘만 낳은 엄마는 시댁으로부터 아들 낳으라는 말을 폐경이 된 나이에도  들어온 엄마는 항상 아들 만 둘을 내리 낳은 큰엄마한테 자격지심이 있었다.


"동우랑이 동원이가 용돈 만원 줄 때 너희들은 2만 원 줘야 하고, 걔들이 100점 받으면 너희는 올백 맞아야 한다."


이 말을 20년간  언니와 나에게 해왔다. 엄마가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어린 나는


"응. 엄마 걱정 마. 나는 잘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 줄 거야."


라고 엄마가 기뻐할 만한 대답을 했고 언니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들은 체도 안 했다.


여기서 동우와 동원이는 큰아빠의 두 아들이자 우리의 사촌오빠들이다.


"네 아빠가 어떤 사람인 줄 아니? 세~상 네 아빠 같은 사람이 없다. 너희들 낳을 때는 어디서 어떤 년이랑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네 언니 낳을 때는 병원비 하려고 조금씩 모아둔 돈을 가져가서는 다 써버리고는.. 맨날 여자가 없었던 적이 없어. 네 엄마가 어떻게 산  알아?"


내가 결혼해서까지도 들어온 말이다.

엄마의 하소연을 근 40년째 듣고 있는 자식들의 심정이 어떤지 엄만 알고 있을까?


" 엄마도 진작 이혼하지 그랬어? 어차피 이렇게 이혼하게 될걸 뭐 하러 참고 살았는데?"


하고 되받아치면


" 그걸 말이라고 해? 너희들 때문에 그때껏 참고 살았지. 너희들 아니었으면 살지도 않았어."


딸들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항상 같은 대답이다.


어렸을 때는 영문도 모르고 꼭 그렇게 해서 불쌍한 엄마를 기쁘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아 키우기 전까지 난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엄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딸들을 앉혀두고 항상 아빠와 시댁 욕을 하던 엄마. 엄마의 하소연 상대가 되어왔던 나는 상에서 가장 나쁜 아빠는 우리 아빠라고 생각하며 자라왔다.


물론 결혼 10년 차에 딸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있는 지금은 아니다. 나쁜 건 나의 엄마였고 지금은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고 내가 아는 가장 고집스럽고 무기력한 사람이고 딸들한테 아빠를 나쁜 사람을 만든 나쁜 엄마이다.


본인이 선택해서 살아온 인생을 왜 '너희들 때문'이라 하며 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냔 말이다.


 왜 엄만 본인과 아빠 그리고 시댁의 문제에 자식들을 끌어들였을까?.

내 불안의 근원은 나의 엄마이고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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