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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작 Jul 25. 2024

07화. 언제나  나이 많은 남자가 좋았다.

내가 금사빠가 되어버린 이유

착하고 일찍 철들었던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니 또 마음이 아프다.

30년이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해 본들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렇게라도  글을 통해 털어놓고 나면 아주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글을 쓴다는 게 나의 숨통이자 대나무숲이 될 줄 몰랐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은 좋은 방법이다.


지금 나의 딸을 보아도 그렇고 나의 과거를 되돌아봐도 11살이 되면 이젠 좀 더 나의 부모와 내가 처한 상황이 조금은 잘 보이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11살. 우리 집이 다른 친구들 보다도 더 불행하고 더 가난하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해주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나이이다. 아빠로부터 수시로 손찌검을 당하고 엄마의 가시 돋친 말을 들으며 언니와 아침저녁으로 욕하고 싸우는 내가, 드디어 우리 집이 싫고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나의 학습 수준은 점점 뒤처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점점 학교 가기가 실어지는 날들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4학년 때 만났던 담임선생님은.. 할말하않이다. 뒤에 쓸 나의 글에 녹여내겠다.


 방학기간 동안 교과서와 3살 차이 나는 이종사촌 오빠로부터 얻어 온 동아전과만 갖고 엄마는 다음학기 교과서 예습을 시키는 게 전부였다. 본인이 자처하여 선생님이 되어 잘 못 알아듣거나 틀리면 거침없이 싸대기를 날렸고 본인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아빠는 무관심. 아빠 말대로라면 자녀교육은 나가서 한 푼 못 벌어오는  엄마만의 몫이었다.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그 시절 지금의 아동학대 개념이 적용되었다면 그럼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까?


평일날은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은 모두들 학원으로 향했고 난 집으로 와서 숙제를 하다가 티브이도 보다가 엄마 심부름도 하다가.. 딱히 바쁜 일이 없었지만 당시 엘리베이터가 없던 작은 저층 아파트 3층에 살던 나는 저녁 6시가 넘어 1층부터 들려오던 아빠의 헛기침소리가 들리면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후다닥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펴고 방문을 닫았다.


아빠의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아빠가 오시면 다녀오셨냐는 인사와 함께 아빠에게 안기고 그런 딸을 안아주며 오늘 잘 보냈냐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아빠는 대체 있긴 할까? 이런 의문을 가진 것도 4학년인 11살쯤이었다.

왜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아빠가 드라마나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장면이 아님을 알았다.

동네에서 쌀집을 하던 나의 단짝친구 미숙이의 아빠는 하교시간만 되면 배달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 미숙이가 나오면 교문 앞에서  미숙이를 번쩍 안아 올리며 뽀뽀를 해주고 자전거 뒷좌석에 태워 데려갔으니 드라마나 동화책에서만 봐오던 아빠도 분명히 현실에 있었다. 그리고 20년 전 결국 엄마와 이혼해 지금은 연락도 안 되는 아빠를 둔 나는 여전히 그런 아빠를 둔 미숙이가 부럽고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다행히도 지금의 나의 남편은 살갑고 아이들에게 세상 다정한 아빠이다. 나와의 싸움만 뺀다면. 이걸 대물림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죽고 싶었던 부모님의 부부싸움. 나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나 역시 남편과 자주 트러블이 생긴다. 다만 우리 엄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직장생활을 꾸준히 해오고 있어 우리 집에선 아직 경제적 학대는 없다는 것.


살아보니 경제력은 부부 사이에서 대단히 어마어마한 강력한 무기였다.


다시 11살 시절 이야기로 돌아와 본다.

김미숙.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했다. 그리고 인기도 많고 선생님들도 이뻐하고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던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미숙이. 이 이름은 아마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름일 것 같다. 일단 쉽고 흔한 이름이고 살짝 촌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 부러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미숙이와 내가 짝꿍이었을 때 봤던 국어시험에서 우리 단 둘만 답이 맞았던 한 문제가 있었는데, 모두들 내가 미숙이 답을 닝했다고 이야기했던 일이 급 떠오른다. 다시 기억해 봐도 억울하다.

자랄수록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던 나는 내가 공부한 대로 쓴 답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했고 미숙이 마저 나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난 왜 정말 내가 공부해서 쓴 답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도 사랑을 듬뿍 받고 못 받고의 문제일까. 30년 전 일인데도 너무 슬프고 아프다. 한 번씩 이때의 일이 떠오르면 마치 11살의 아이처럼 숨죽여 운다. 난 아직도 자라나지 못했나 보다.

나의 글을 읽는 누군가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까?


난 항상 아저씨들이 좋았다. 편안했고 든든했고 곁에 있으면 안정감이 들었다.

나의 짝사랑의 상대는 언제나 나이 많은 학교 선생님, 아르바이트하는 곳 사장님이었고 아마도 나의 가정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차차 등장하게 될 지금의 남편이 8살 차이 나는 사람인 것도.


엄마의 사랑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빠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딸들은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근거 없는 동경을 갖고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줘도 금사빠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나처럼 나이 차이가 많은 학교 선생님이나 아르바이트하는 매장 사장님 등을 좋아하게 되더라.


어린 시절에는 몰랐다. 나는 왜 나이 항상 많은 남자들이 좋을까?


이런 현상은 얼핏 보면 문제처럼 보이지 않을 있지만 금사빠는 자칫하면 범죄로 까지 이어질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남자아이들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충분히 넘치게 받아야 면역력도 좋아지고 금사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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