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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작 Aug 01. 2024

09화. 부부싸움은 언제나 월급과 연결되었다.

중학교 입학준비

난 국민학교 졸업세대이다.


내가 졸업하던 해 1996년에 아마 초등학교로 바뀌었던 것 같다. 요즘에는 1월에 졸업식을 하는 곳이 많아졌는데 나 때는(라때는~) 졸업식은 언제나 2/14일 전후였다. 졸업을 하면 3월 2일 중학교 입학식 전 까지는 교복도 맞추고 예비소집일도 가고 미리 공부도 좀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기간이 15일 정도 있다.

쿵쾅쿵쾅. 나의 중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또다시 부모님은 싸우셨다.

우리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상이었지만 여전히 자식들은 겁이 나고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섭고 눈치가 보인다. 아빠는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리모컨을 집어던졌지만 내 기억에 엄마를 때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언니와 나를 마구잡이로 때렸고 우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던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다.


'교복이랑 준비물 사야 하는데... 입학금도 내야 하고..... 하아..'


TMI지만 나 때는 국민학교 때 육성회비와 중고등학교 입학 시 때 별도로 내는 입학금, 그리고 분기별로 일 년에

학교에 내야 하는 등록금이 있었고 돈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마다 며칠을 가슴 졸이며 설이다 하루이틀 전 안 되겠다 싶을 때 겨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왜 이걸 이제야 말하냐며 부모님 양쪽에 모두 욕을 먹고 혼나기 일쑤였다.


'아니..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니 말을 못 했지.'


외벌이로 가정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학교 준비물이며 교복에 실내화 정도는 얼마든지 사줄 수 있는 형편이었다. 다만 부부싸움을 하면 아빠는 엄마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고 이것 역시 부부싸움의 원인이었다. 요즘 같으면 경제적 학대라는 명목으로 이혼사유가 되지만 90년대는 그렇지 못했다.


아빠가 월급을 내놓지 않거나 생활비를 주지 않으면 엄마는 자리를 깔고 누웠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24시간을 며칠이고 화장실만 오가며 밥과 반찬을 하지 않았고 빨래도 하지 않았고 보란 듯이 안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뒤돌아 누워만 있었다. 때론 돈이 없다며 가족이 모두 모인 저녁 식사에 밥과 소금 한종지만 내놨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찬다.


그건 파업이었고 엄마만의 시위 방법이었다.


하아.. 대체 엄만 왜 그랬을까?

딸들은 이미 훌쩍 자랐는데 왜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저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시위를 했는지.. 내가 엄마 나이가 됐음에도 난 모르겠다. 살아갈수록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실패다.


'나 같으면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나가서 내가 벌었겠다.'


하지만 엄만 끝까지 엄마만의 방법을 고수했다.


아빠는 수시로 엄마에게 월급을 내놓지 않았고 그 시절은  월급을 봉투에 담아 직접 현금으로 주던 시절이라 받은 사람이 주지 않으면 받아낼 방법이 없었다.


 엄마는 준비물과 용돈이 필요하다는 언니와 나에게


"돈은 네 아빠가 움켜쥐고 안 내놓고 있으니 네 아빠한테 얘기해"


라며 화를 냈고 아빠에게 수시로 손과 발로 얻어맞으며 자라 두려움만 있는 나는 아빠의 공간인 안방으로 들어가 입학공지문을 내밀며 미리 계산해 둔 사야 할 준비물과 입학금 금액을 말해야만 했는데 그 순간이 정말 너무너무 싫고 수치스럽고 화가 났다. 겨우겨우 입을 떼 말을 하면 아빠는 10분 이상을 침묵하며 신문만 보다가 겨우 지갑을 꺼내서  필요한 금액을 묻고 그만큼 꺼내주며 갖고 나가라는 말만 했다.


'휴~다행이다.'


안방에서 돈을 받아 나온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바로 엄마한테 돈을 주며 이제 준비물

사러 가자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 네 아빠랑 가.! 돈은 네 아빠가 줬는데 왜 나한테 가자고 해! 어휴 지겨워."


"...................? "


'대체 이게 무슨...  이제 14살 된 나한테 대체 어쩌라고들 이러는 건가. 왜 부모의 싸움에 자식을 끌어들이나.'


지금 이 순간 글을 적으면서도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고 눈물이 난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나한테 소설 쓰지 말라고 했다.


"참나~  상상력도 좋다. 난기억도 안나는 얘길 하면서 소설도 잘 쓴다."


유튜브로 보게 된 오은영박사님의 방송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부모님들은요, 아마 자식들이 섭섭하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마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자식을 사람 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저 말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입에서 나올법한 말이가?'


 과거 자식들은 어리고 남편은 개차반이고 삶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백번 양보하고 이해해 보지만 지금은 저리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자식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학부모가  되었다면 적어도 저리 말을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럼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나.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지만 백번 생각해 봐도 나 역시 좋은 엄마는 못된 건 마찬가지이다. 핑계를 대보자면 김창옥교수님 말처럼 부모로부터 좋은 언어를 듣고자라지 못해서라고 나름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지만 어찌 되었건 상처받고 병들어가는 건 아이들이다.


난 얼마나 좋은 언어를 사용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애써  나의 부모님을 들먹이며 변명하고 면죄부로 삼아 보지만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난 너무  잘 알고 있다.


다시 나의 과거 중학교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결국 교복이며 운동화와 준비물은 나 혼자 사러 다녀야 했다.


교복은 입학 예정인 학교 앞 교복전문점에 가서 맞추었고, 실내화와 공책은 교복을 맞추고 나오면서 학교 앞 문구점에서 샀다. 운동화는 항상 엄마랑 다니던 지하상가에 가서 혼자 신어보고 샀다. 14살. 만으로 12살. 나의 첫 교복은 결국 나 혼자 가서 맞추고 돌아왔다. 이 정도는 손과 발이 있고 눈이 보이고 말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부모님이 밉다. 


혼자 교복을 맞추고 체육복을 사고 실내화를 사고 운동화를 사러 이리저리 다니는 나는 혹시나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웠고 창피한 맘이 들었다.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혼자 처리하지 못해서 부모님과 동행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봤던 책이 이나 티브이에서는 생애 첫 교복을 맞출 때 엄마아빠는 교복을 입고 나오는 딸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 딸 다 컸네. 기특하네~"


등의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옷도 한벌 사고 외식도 하고 돌아왔는데 나는 대체 뭔가.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신 것과 고아인 아이들과 뭐가 다른가. 그러나 엄마는 항상 당당했고 매정했다.


" 밥 굶고 학교도 못 다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하네. 복에 겨워서 저러지. 저거"


나의 환경에 불평을 하면 엄마로부터 돌아오는 답변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굶고 학교 못 다니는 애들이 널렸으니 이렇게 사는 것도 감지덕지하라는 말.


그럼 두 살 많은 언니가 중학교 올라갈 때도 그랬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엄마가 동행해서 교복을 맞추고 실내화와 준비물, 신발을 사줬던 기억이 난다.


첫 딸은 처음이라 함께 해줬는데, 한번 해보니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귀찮아졌던 걸까?


부모가 되어 두 아이들을 키워보니 확실히 나도 첫째 아이의 일에는 처음인지라 더 신경을 쓰고 둘째 일에는 살짝 무뎌지기는 하더라. 그렇지만 이건 다른 문제지 않는가.

다시 기억을 해내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고 부모님이 너무 밉고 괴롭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겨우 그 정도로 부모가 미우면 세상에 사랑받는 부모 하나 없겠네. 저 정도면 훌륭한 부모지. 라때는 말이야~"


하며 더더욱 아픈 본인의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나의 깊고 쓰라린 상처 중 하나이고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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