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향고2에서 언급된 동유럽의 스위스, 카즈베기 여행-②

어느 X세대의 여행산문집 사서고생기(2018 중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by 렐레

트루소 밸리 트레킹을 하는 날이다.

동유럽의 스위스라 불리는 조지아에서 하루 종일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이번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셈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

구름인지 안개인지도 모를 것들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2006년에 스위스에 갔을 때도 4일 일정 내내 비가 오는 바람에 융프라우 올라가서도 아무것도 못 보고 내려온 적 있었는데...

오늘도 힘들게 걷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 보고 오는 건 아닐까?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내일은 다시 트빌리시로 가야 해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20년 전, 아무것도 안 보이는 융프라우 정상에서




카즈베기(스테판츠민다)에서는 주타 트레킹과 트루소 밸리 트레킹을 선택할 수 있다.

주타 트레킹이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대신 좀 더 힘들다고 하길래 우린 트루소로 예약했다.

노화로 인해 평지라고는 하지만 6시간의 트래킹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남미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여행은 젊었을 때 다녀야 한다.



여전히 날은 흐리고 트루소 트레킹 입구까지는 30분 정도 차로 이동해야 해서 어제 11시 버스표를 예매했다.

점심에 먹을 샤와르마(케밥과 비슷)와 맥주를 사서 미니버스에 오르니 탑승객은 우리를 포함해 총 7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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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소 입구에 도착하니 그렇게 흐리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랗다.

우와... Thanks God!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아니, 내가 아니라 나머지 여섯 명 중의 하나 일 거다.

누가 구했든 어떠랴 기분이 급 좋아졌다.

버스기사와 이곳에서 5시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 걷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비현실적인 풍경들이 펼쳐졌다.

평소에는 양 한두 마리만 봐도 "와~ 양이다." 했을 텐데 떼로 모여 다니며 풀을 뜯는 양 떼들과 내 앞 길을 막는 소, 옥빛 계곡물과, 물소리를 들으면 걷는 오솔길, 믿을 수 없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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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감탄하며 걷는 사이에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서양 젊은이들이 짧은 인사를 건네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12시 반, 슬슬 다리도 아파오고 점심으로 포장해 온 케밥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 떡하니 앉아서 먹는 것도 웃기고 또 주위가 온통 똥밭이기도 해서 마땅한 곳을 찾기 위해 한 시간이나 더 걸어 냇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몸을 움직여서인지 눈앞에 보이는 풍경 때문인지 아님 진짜 맛집이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샤와르마는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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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쉬고 다시 걷다 조지아 깃발이 펄럭이는 수도원에 도착했다.

보통은 자카고리 요새를 찍고 다시 되돌아 오지만 우리는 수도원을 반환점으로 삼기로 했다.

이미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젊은이들 몇몇이 또다시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지나쳐 갔기 때문이다.

조지아 깃발을 붙들고 에베레스트라도 등반한 냥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왔던 길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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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 30분 전에 무사히 버스 탑승장소에 도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딱히 비를 피할 곳도 없고 산그늘에 있다 보니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30분 정도는 일찍 와도 되지 않나?'

버스는 야속하게도 정말 딱 6시에 도착했고 탑승인원은 6명.

한 명이 부족했다.

그래서 30분을 버스에서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그냥 왔다.

8년이 지난 지금도 남자 친구랑 술을 마시다가 조지아 얘기가 나오면 트루소 밸리에 두고 온 그분을 떠올린다.


"그분은 어떻게 집에 갔을까? 다른 투어버스를 타고 갔겠지?"



마을로 돌아와서 버스에서 내리는데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찌릿하고 통증이 왔다.

갑자기 걸어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맛집이라고 하는 코지레스토랑에 갔는데 이미 만석이었다.

몸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그냥 보이는 곳(cafe 5047m)에 들어가서 므츠바디(조지아식 바비큐)와 비프수프를 시켰다.

나는 원래 고수가 조금만 들어있어도 아예 못 먹는데 이상하게 이날은 고수냄새나는 비프수프도 먹을만했다.

(설마 비프스프에 고수가 들어갈까 싶어서 빼달라는 말을 못했다.)

되려 몸이 사르르 녹으면서 좀 살 것 같았다.

물론 이날 이후로 고수는 조금도 먹지 못한다.

신비로운 풍경과 설명할 수 없는 몸상태를 동시에 경험한 잊을수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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