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꽃잎을 살랑이던 샤스타데이지에서 달걀 노른자위 같았던 금계국을 거쳐,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키 큰 루드베키아가 언덕배기를 휘감고 지천으로 피어났습니다.
피고 지는 꽃들을 따라 계절이 쫄랑대며 바지런히 따라옵니다. 드문드문 기세에 눌린 코스모스가 알 박혀 수줍은 얼굴을 드러냈지만 루드베키아의 강력한 텃세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습니다.
뒤늦게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루드베키아는 화원의 왈패 같은 꽃입니다. 에너지를 주체 못 하는 중2병 걸린 소년처럼 때론 독불장군식의 안하무인으로 연약한 꽃들을 윽박지릅니다. 당당한 체구에 각양의 화려한 꽃만 보자면 그 오만이 넉넉히 수긍이 되지만, 패거리로 몰려 텃세를 부려대는 통에 꼴값을 못하는 옹졸함으로 비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곧 눈치만 살피면서 주눅이 잔뜩 든 코스모스의 날은 옵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겁 없이 나부대던 금계국을 밀쳐낸 루드베키아 역시 낭창한 코스모스에게 자리를 내어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백일홍을 희롱하면서 더불어 여름과 가을을 꿰뚫게 되겠지요.
밭에는 어느 틈엔가 메추리알 프라이를 빼다박은 쑥갓꽃이 쑤욱 머리를 쳐들고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습니다. 크라운데이지, 앙증맞은 노란 쑥갓꽃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낙화생의 보일락 말락 한 샛노랑 꽃들이 수줍은 듯 퍼런 잎사귀 아래 매달려 있는 게, 곧 깜장 비닐을 걷어야 할 모양입니다.
게으른 농부와 찰떡궁합인 기특한 녀석이 바로 낙화생이라 일컫는 땅콩입니다.
어제부로 올 해의 땅콩 심기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7월의 작렬하는 햇살 가운데 여린 모종을 꽂아놓은 돌쇠아재의 게으름은 농부로서는 심각한 직무유기입니다. 한쪽에서는 열매를 맺기 위한 땅콩의 자방병이 스멀스멀 꼬랑지를 땅으로 내리고 있는 판국에, 또 한켠에서는 용광로 속으로 여린 생명을 방기 하다시피 던져두었으니 농부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지경입니다.
기세등등, 야심 차게 덤볐던 동생들의 밭뙈기는 무책임한 초보농꾼들의 기약 없는 손길을 기다리는 작물들이 목을 길게 늘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갈증보다 견디기가 힘드나 봅니다.
꽤나 많이 심었던 방울토마토랑 왕토마토는 결국 청고병인지, 잎마름병이지 모를 몹쓸 전염병에 휩쓸려 애간장만 태우다 죄다 뽑혀나가고 말았습니다. 작물은 농부의 음성과 발자국 소리로 자라는 법인데, 단오날 견우직녀 상봉하듯 주인 농부를 맞으니 수원수구 뉘를 탓할까요.
상추 따서 여름 오기 전에 삼겹살에 탁주 한 사발 하자던 호기로운 큰소리는 이미 허공에 흘러간 빈말이 되고 꽃대는 헝클어진 상투머리로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목신의 오후인들 이토록 허허로울까요.
게으른 농부의 밭에는 곡물보다는 꽃들이 더 신바람이 났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다는 이상한 나라의 동화 같은 요상한 얘기로 게으른 농부의 한가한 오후는 가득히 채워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