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에 어떤 이의 전화번호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운 적이 있습니다. 지운다고 지워질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편이 자칫 상대를 본의 아니게 곤란하게 만들 건덕지를 없애는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연락처 제거를 선택하기까지도 힘겨웠는데, 막상 삭제 여부를 다시 확인하는 잔인함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삭제와 삭제 취소의 챗바퀴를 세 번이나 돌리다 간밤에 부재자 표시가 뜬 번호의 사연만 확인한다는 핑계하에 어물쩍 인연줄을 이어놨습니다. 역시, 미련이란 모질게 질긴가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매사가 조심스러워지는 게, 나잇값에 대한 중압감 때문입니다. 여전히 어리석고 경솔하지만, 적어도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 보다란 말은 듣지 않겠다 다짐합니다.
불변의 금과옥조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말은 아끼고, 지갑은 열라"는 진리입니다. 궁색하고 쪼잔한 것만큼 꼴불견도 없습니다.
나는 어린 날에 어른이 되면 누구나, 그야말로 '어른'이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엄청나게 고민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이란 건 까맣게 모르고 세월이 훈장처럼 쌓이면 어딘지 여유롭고 대범하며 사람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나 보다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습니다.
여전히 옹졸한 시선으로 세상을 가두고, 자기만의 얄팍한 옹고집 속에 갇혀있는 제 자신을 보면, 역시 나잇값에도 등급이 있구나 싶고, 세월에 걸맞는 댓가를 요구하는구나 싶습니다.
총량의 법칙은 사랑, 미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인 줄 알았습니다.
너무 슬퍼도 눈물이 메마르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도 소비되다 보면 언젠가는 무덤덤해 질거라 봤습니다.
사랑, 분노, 억울함, 그리움...
나이가 이 모든 감정을 무디게는 만들지만, 결코 고갈시킬 수는 없나 봅니다. 총량의 한계치가 가늠이 안 되는 깊이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내재된 본연의 감정이란 자체가 총량의 법칙에서 벗어난 예외의 영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외라고 하는 변수 또한 신의 완벽한 설계의 한 부분이니까요.
신이 쳐놓은 거미줄에 자칫 걸려들 뻔했습니다. 신이 얄궂은 장난을 걸어온 겁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사랑법은 기울기 15도였습니다. 딱 그만큼, 곁눈질로만 슬금슬금 안보는 척 바라보는 정도, 행여 들킬까 뒷걸음질로 나아가는 딱 그 정도, 본인의 미소를 한 번만이라도 좀 봐달라고 어물쩡거리지만 끝내 내 사랑은 여기 까지라며 긴긴 속앓이를 위로하는 선.
그러면서
남자는 말합니다.
"내 주제에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사랑..."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그리움이 닳는 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