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렛나루와 짙고 더부룩한 수염 때문에 내 별명은 늘, 산적 아저씨, 산도둑놈, 김 꺽정이었다.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까칠하고 무성한 텁석부리 수염은 각진 턱선을 숨기는 순기능을 하지만, 순전히 게으름이 조작해 낸 이미지다. 내일 내일 하다 보면 전기면도기로서는 감당이 안될 지경이 되어버리니 내킨 김에 확 길러버린 결과가 오늘의 산도적놈이 된 것이다.
"니들이 싸나이의 진정한 멋을 아나!"
늘 같은 핑계를 둘러대며 제 딴에는 오, 쥐기는 걸 그러면서 남자들만 알고있는 자기도취에 빠진다.
죠지 클루니가 아닌 탓에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기는 하지만, 지저분하고 없어 보인다는 측과 로망이었다며 부러워하는 양측이 거의 비등하다.
마눌은 일찌감시 당신 맘대로 하라며 항복선언을 했는데, 문제는 한번 물면 놓지를 않는 불꽃여인 엄니다. 어머니란 존재에게는 '잔소리'가 빠지면 삶의 낙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동생은 일부러 엄니 앞에서 큰소리로 방귀를 뀐다. 어쩔 땐 얼굴에다 궁댕이를 슬며시 붙이고서 뻥 하고 쏴재끼니 기겁을 한다.
"저노무 똥꾸녕!"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이다.
방귀와 친밀도. 그만한 잣대도 없다.
동생에게 엄니를 웃게 만드는 필살기, '방구'가 있다면, 나는 다 커버린 자식에 대한 애미로서의 존재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수염'이 있다.
불꽃 잔소리, 당최 포기란 걸 모르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이길 재간은 없다.
면도를 마친 말쑥한 얼굴을 쓱쓱 문지르며 이 여사는 늘 말한다.
"아이구, 우리 아들. 자알 생겼네"
그 아들의 나이는 환갑이다.
수염에 대해 포기를 모르는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시리도록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여인, 싸나이의 진정한 멋 따위는 눈꼽만치도 안중에 없었던 집요한 여인이었다. 단지 뽀뽀할 때 따갑다는 이유뿐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시시한 이유로 싸나이의 참멋을 포기하기에는 억울했다.
늘 5mm의 벽을 넘지 못했다. 까칠, 더부룩. 한 단계만 더 넘어서면 숀 코네리급의 간지를 뽐낼 수가 있는데, 화룡점정의 마지막 한 획은 늘 텁석부리 산적에서 좌절되었다.
포기를 포기한 두 여인의 파상공세에 대차게 맞서야 했다. 여인의 잔소리에 로망을 접다니, 언젠가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꼴을 보게 될 것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수미는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다. 뽀송뽀송한 솜털 얼굴의 나이에는 존재만으로도 넘치도록 이쁘다. 정작 당사자만 모른다.
출근할 때면 오분이면 닿는 거리에 사는 수미를 늘 태워 다녔다. 새벽잠 많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나이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먼저 나와서 나를 기다리는 경우가 없었다, 크락션이 울리는 간격이 한계에 다닿았다 싶으면 빼꼼 얼굴을 디밀었다. 대문 안쪽에서는 뭔가 해결이 안 된 일이 있는지 수미 모친의 저 가시나, 말만 한 가시나가 우짤라꼬 저 모양이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틀림없이 밤새 게임에 빠져있다 잠 쬐금 자고 누에처럼 몸뚱이 하나만 쏘옥 빠져나온 게 틀림없었다. 그 와중에도 손에는 조그만 파우치와 립스틱, 거울은 제 몸 같이 끼고 있었다. 갓 스물의 에너지 넘치는 수미는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기가 막히게 화장을 잘했다. 특히, 양쪽 눈썹을 대칭으로 그려내는 솜씨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신의 경지였다. 입은 나불나불 잠시도 쉬지 않으면서 말이다.
"과장님은 눈에만 필요한 화장품 갯수가 올매나 되는지 압니꺼?"
스킨도 안 바르는 내게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하여간 눈에만 투자해야 되는 화장품은... 어쨌든 억수로 많았다.
풋풋한 스물의 아가씨는 밥을 먹을 때나 수다를 떨 때나, 하다 하다 타이핑을 치는 중간의 찰나 같은 순간에도 거울을 들여다봤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헤시시 웃기도 하면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는 것 같았다.
어김없이 엄마의 고함소리를 뒤로 한 채 허겁지겁 차문을 박차고 뛰어든 수미, 수미가 맞나? 아마 맞을 거야. 수미가 빨랑 출발하자며 내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뜨아악!"
순간, 심장마비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니, 니, 누고?"
"히히"
배시시 웃는 수미, 수미에게는 눈썹이 없었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여인네의 쌩얼을, 그것도 평소 삐에로같이 두터운 화장의 얼굴만 보다가.
새벽 댓바람에 허옇게 밑화장만 한 전설의 고향에서나 만나봄직한 창백한 낯빛, 눈썹 없는 얼굴을 맞닥뜨린 순간 악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날 아침 수미는 나를 두 번이나 놀래켰다.
출근길의 달리는 차 안에서, 그것도 고작 이십 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스물의 수미는 완벽한 스킬로 풀 메이컵 화장을 완성하고 본래의 제 얼굴로 돌아갔다.
수미의 낙과 자신감은 오로지 화장품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니들이 게 맛을 모르 듯,
여인네들이여,
싸나이의 진정한 멋, 수염을 아나?
살바도르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