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 삭은 김치 아래 꼭꼭 숨어있던 고등어가 존재를 냄새로 밀어 올렸다. 김치맛이 끝내준다며 한점 집어 들어 내게로 건네는 젓가락 아래로 허연 뱃살의 고등어가 시뻘겋게 모로 누워 있었다. 펄떡이는 고등어를 가두기에는 짜부라진 양은냄비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어는 잘게 해체가 되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검푸른 바닷속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고등어였을 것이다.
토막 난 고등어를 뒤척이다 슬며시 제육볶음으로 눈을 돌렸다. 해체당한 고등어가 마치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 같았다.
식사 자리에서 어쩌다 '죽음'이란 단어가 화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죽음 역시 공평하지 않다, 죽는데도 그 빌어먹을 돈이 필요하다는 일치된 결론에 쉽게 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밥상에 머리를 맞댄 이들의 처지가 예외 없이 변방인이었던 탓이었다.
다들 굴곡진 인생서사를 넘어선 덕분인지 죽는다는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적어도 말로는 그랬다. 앞으로 뭔가를 하기 위해서 좀 더 살아봐야겠다는 바람 역시 없었다. 그냥 그냥 살아지니 사는 거지 인생 별거 있겠냐는 볼멘소리만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리들이 먹지도 않을 고등어살을 뒤적거리는 내 손길을 따라다녔다.
내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한 확신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미련 떨지말고 병원을 가보라고 한다.
00병원 글자들이 큼지막하게 아로새겨진 허연 환자복과 파란 슬리퍼를 기억한다. 심야에 병원의 담장을 넘어 야반도주를 했던 아버지를 쫓아온 병원의 로고와 상호들이 죽음보다 잔인한 절망을 안겨주었던 밤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게 병원은 또 하나의 아물지 않는 상처이자 통곡의 밤을 되새김질시키는 쓰라림이다.
"죽을 때 되면 죽겠지요 뭐"
아버지는 여행길을 떠나는 방랑자는 늘 짐이 가벼워야 한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 당부하셨다. 다행히 남길 게 없다.
어제도 어김없이 팥죽 같지만 훨씬 짙은 새까만똥을 쌌다.
배는 여전히 밤낮없이 칼로 마구 후비는 듯 아프다.
아침, 정해지지 않은 종착지를 향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자유'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