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아빠는 뭐 해?"
젠장, 올 것이 왔다. 아홉 살 난 딸레미의 기습적인 질문을 얼버무리기에는 눈빛이 너무나 곰 살 맞았다.
"응, 아빠 가게 해."
"무슨 가게?"
오지게 걸려들었다. 적당히 둘러대고 방귀 새 듯 꼬랑지를 감추기에는 이미 글러먹은 것 같다.
"응, 슈퍼! 슈퍼마켓!"
황급히 둘러댔지만 어린 딸레미 앞에서의 거짓부렁은 객쩍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불법 유사 휘발유 장사 한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 그럼 아빠 슈퍼에 놀러 가도 돼?"
"요새 니는 머 해 묵고 사노?"
모처럼 쐬주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친구 녀석이 대뜸 물었다. 대형 마트를 운영하는 친구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거드름이 한껏 묻어났다.
"뭐 한다. 돌쇠 점마 머 하는지는 고마 신경 끄라."
남 속도 모르고 중뿔난 소리로 거드는 친구 녀석 또한 속내는 '니 하는 꼬라지가 다 그렇지 뭐' 하는 비아냥이 고대로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래, 이 새끼들아! 내 가짜 휘발유 장사 한다. 그래서 뭐 우째라꼬.
싸 한 쐬주와 함께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이 위장 속으로 빨려 내려갔다. 쪽 팔림은 안주였다.
그간 천하에 돼먹지 못한 발피 잡놈에 허섭스레기로 살아왔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땅바닥으로 처박힌 사나이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차라리 쌈질이나 하고 다닐 때는 누군가가 니 머 하노라고 물으면 시원하게 답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대답은 고사하고 어리버리 시선 회피에만 급급하니 사내로서의 가오가 영 말이 아니었다.
친구는 물론, 제 피붙이에게 조차 구라를 쳐야 하는 가짜 휘발유 장사는 과감히 접기로 했다. 돈이고 나발이고, 싸나이의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는 쪽으로 맘을 굳혔다. 단지, 뽀대가 나지 않아서다.
돌쇠가 강보에 싸인 핏덩어리 아들내미를 처음으로 마주한 날은, 좁혀오는 경찰을 피해 도망을 치기 위한 옷가지 몇 개를 챙겨가려고 야밤에 제 집을 도둑괭이처럼 숨어든 날이었다.
젖냄새에 싸인 갓 난 아들과의 첫 대면.
새록새록 잠이 든 아들내미의 머리맡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고롱거리며 곤히 잠든 핏덩어리 살붙이 아들과의 첫인사이자, 기약 없는 도주길의 마지막 인사였다.
"이, 이기 무신 주책이고!"
또로록 한 방울의 눈물이 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돌쇠는 스스로에게 흠칫 놀라 얼른 눈을 훔쳤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들의 조막만 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무심코 떨어지는 만근추보다 무거운 한 방울의 눈물.
내가, 세상을 잘 못 사는구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구나....
이유는 몰랐지만, 막연히 그랬다.
돌쇠는 무르팍을 움켜쥐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거와의 단절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아빠는 뭐 해?"
"아빠? 응, 아빠는 노가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