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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와의 한 판!

by 김석철


저돌.



선을 넘었다.
비록 일방적으로 그은 마지노선이지만, 그간 암묵적으로 잘 이어져 온 평화의 장벽이었다. 멧돼지뿐만 아니라, 유해조수라고 퉁쳐진 모든 야생동물을 모두 싸잡는 통제선이 삼일 전부터 완벽하게 뚫려버렸다. 농막에서 열댓 걸음 위의 밤나무 그루터기가 벌집이 되었을 때 감을 잡기는 했다. 다음 공격 목표는 내 밭의 고구마가 틀림없을 거라고.


해작질의 규모가 남 달랐다. 마치 불도저가 여기저기 헤집어 놓은 것처럼 일대가 쑥대밭이 된다. 폭격 맞은 펀치 볼인들 더하지는 않을 성싶다. 과실수에 눈독을 들이면 과실수 가지를 아작을 내어버리고, 구근 작물에 구미가 당기면 그 땅은 암반일지라도 기필코 갈아엎어 농부의 새까만 속을 뒤집어놓는다. 고라니는 깨작깨작 입질을 하다가도 조짐이 이상하다 싶으면 냅다 36계 줄행랑부터 치는데, 저돌의 아이콘 멧돼지는 역시 이름값을 한다. 갈기를 바짝 곤두세우고 눈깔을 부라리며 위협을 하거나 수 틀리면 사정없이 들이받아 버린다.

온 동네 개란 개들이 동시에 목청껏 짖어대며 발작을 했다.

틀림없이 멧돼지 패거리가 출몰한 것이다. 밤 열두 시가 조금 넘는 야심한 시각이었다. 후렛쉬와 몽둥이를 거머쥐고 살금살금 다가가 불을 확 밝혔다. 감히 대한민국 육군 만기 제대 돌쇠에게 겁 없이 도전장을 날린 놈이다. 이참에 확실한 본때를 보여야 한다.

제법 떡대가 당당한 놈이 고구마밭 끝점에서 노략질을 시작 하려던 참이었다. 고함을 치르면서 요란하게 달려 나갔다. 잠시 왠 놈인가 살피더니 기세에 밀렸는지 슬금슬금 수풀 속으로 꼬랑지를 말아 넣었다.

출몰 첫날이었다.


어차피 멧돼지가 단단히 눈독을 들이고 침을 발라 둔 고구마밭이라면 미련없이 단념을 하는 게 맞나? 그래도 최대한 버티며 방어를 해야 하나? 무조건 항복하기에는 농꾼으로서의 알량한 오기가 허락이 되지 않았다. 지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즉시 진돗개 2 상황 선포, 결전의 준비를 시작했다.


상황 2일째; 간밤의 조우 후 경험상 며칠간의 소강 국면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멧돼지들의 행동 양상에는 항상 2,3일 정도의 텀이 있었기에 긴장을 풀고 늘어졌다. 열 시쯤 용이가 벼락 같이 짖어댔다. 한참을 짖어댔지만, 멧돼지는 아닐 거란 확신이 있어서 편히 하룻밤을 보내버렸다.

다음날 이슬이 마르기도 전 이른 시간, 땅콩 수확을 위해 농장의 제일 윗편에 위치 한 밭으로 나갔다 눈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밤새 활개를 치면서 얼마나 파헤쳤는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이틀째 밤에도 멧돼지는 어김없이 출몰해 준동을 했는데 왜 동네 개들은 조용했던 거지? 나의 예측은 놀림을 당했고, 멧돼지는 보란 듯이 밭을 유린했다. 2 차전은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상황 3일째; 나를 똥파리 보듯 깔본 녀석은 오늘 밤에도 틀림없이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노련한 경계병 용이가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매복으로 쓸데없는 힘을 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두어 차례의 공격 성공으로 탱기붕천한 놈은 기고만장, 겁대가리를 완전 상실한 상태라고 사료된다.

즉, 나의 승리다!


울타리를 뚫으려 좌충우돌 미친듯이 날뛰었다. 그물코에 발이라도 걸려들기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똑똑하고 날렵한 녀석은 용케도 피해나갔다.

미친 듯이 울타리 그물을 박아대던 놈이 갑자기 홱 돌아섰다. 다행히 암컷이었는지 특유의 위협적인 송곳니가 보이지 않았다. 불과 1미터 앞에서 자세를 바꾼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바짝 낮추었다.

동물이 상호 간 눈을 마주한다는 의미는, 그렇다, 정면 돌파를 하겠다는 의지다.


찰나 같은 침묵이 흘렀다. 정면 승부다!

놈이 가속을 붙이는 순간, 나의 패배는 자명하다.

그래 오늘 한 판 제대로 붙어보자, 둘 중 하나는 양단간에 끝장을 보자!

선빵만이 살 길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놈을 향해 재고자시고 할 것도 없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이판사판, 피차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의 막다른 골목, 한 밤중에 사람과 멧돼지가 뒤엉켜 붙은 희대의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용이만 한 탄탄한 체구에서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힘과 탄력이 생생히 몸으로 느껴졌다.

문제는, 마땅히 붙잡을 데가 없으니 마치 샅바 없는 씨름과 같았다.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놈의 등판에 사정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지만, 타격감이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되려 가죽의 탄력에 주먹이 퉁겨져 나오는 아찔한 판국이었다. 대미지를 조금도 입지 않은 놈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버둥댔고, 그 힘은 압도적으로 강력했다.


한바탕 휩쓸고 간 달밤의 결투는 눈 깜박할 사이, 번갯불에 콩 튀기듯 벌어진 사건이었다.


울타리 하부를 뚫고 호박밭 너머의 언덕으로 줄행랑을 쳤다. 격해진 감정에 쫓아가며 내지런 소리로 계곡이 쩌렁 울렸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녀석도 불의의 일격에 분통이 터졌는지 멀리 도망가지도 않고 가까운 수풀 속에서 거친 숨을 헐떡이며 씩씩거렸다. 불시에 역공이라도 당할까 슬슬 두려워졌다. 뒷걸음질로 슬금슬금 호박밭을 빠져나오면서 멧돼지와의 한판은 끝을 맺었다.


완벽한 돌쇠의 한판승!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암컷이기는 했지만, 심야에 맨몸으로 멧돼지와 맞붙은 사나이 돌쇠 아재.


아, 근데...

이 지독한 멧돼지 체취는 도대체 어떻할 거냐고!


크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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