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가닥 딸가닥.
붕어가 익어간다.
6자×6자.
한 사람이 팔다리를 펴고 누울 수 있는 넓이, 곧 1 평이다.
스스로를 옭아 맨 12시간이 허용해 준 공간은 겨우 0.9홉 남짓에 불과했다.
0.9홉 공간에서의 나는 붕어빵 장수 털보산적 아저씨였다.
0.5톤의 라보 트럭 짐칸에 천막을 두르고 가스통과 열 마리 붕어가 누울 수 있는 빵틀을 얹었다. 심지어 붕어빵도 아닌 잉어빵이라고 손수건만 한 간판도 걸었다. 어묵과 잉어빵, 그리고 구렛나루가 더부룩한 털보의 겨우내 동거가 시작되었다.
단속 때문에 시도 때도 없는 도망을, 때론 상가의 빵집으로부터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거친 항의를 죄인처럼 다 받아내야 했다.
대가리에 핏자국이 겨우 지워질락 한 젊은 놈이 하고 많은 일 중에 붕어빵 장사라니. 엄니는 혀를 끌끌 대며 우짜다 야가 저리 됐을꼬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를 않았다.
네 마리에 천 원. 인심이 후한 털보 아저씨는 언제나 한 마리씩을 더 넣어 주었다. 다섯 마리에 천 원이랑, 네 마리에 천 원이지만 한 마리는 덤으로 선심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피차 기분 좋은 조삼모사인 셈이다. 꼬신 땅콩도 스리슬쩍 붕어 창자 속에 하나씩 빠뜨려주었다.
못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사람은 없다는 횡단보도 신호등 옆의 산적아재네 붕어빵틀은 연일 불이 났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교과서는 단호하게 선언을 했고, 순진한 나는 금과옥조의 교훈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개뿔도 모르던 소싯적에 그랬다는 말이다.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저했던 일이 붕어빵 장수였다. 쌍대구리배에 올라 망망대해에서 참조기를 쫒고, 막장인생길 탄광의 광부, 노숙자로서의 일 년 등등 별의별 일을 경험했지만, 선택에 주저함은 없었다. 0.5톤 트럭에 두부랑 생선을 싣고 시골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장사일을 할 때도 그랬다. 고등어 눈깔을 닦으면서도, 꼭두새벽에 방송 소리 시끄럽다고 골목길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을 때도, 먹고사는 문제에 귀천을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늘 새로움과 동행했고, 새롭다는 것은 짜릿한 설렘이었다.
노릿한 붕어는 얄팍한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붕어와 오뎅을 파는 게 아닌, 알량한 가오를 파는 대가를 얻는 거라고 생각했다.
0.9홉의 좁아터진 공간은 '나'라는 인간의 크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1평도 안 되는 자잘한 인간이 천 원짜리 한 장에 삶을 저당 잡힌 채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바닥을 친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무력감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나는 비루한 0.9홉 붕어빵 아저씨였다.
세상이 나를 0.9홉에 가둔 게 아니라, 0.9홉만 뺀 온 세상이 내 속에 갇혔다는 생각은 왜 하지를 못했을까. 적어도 내 스스로 만큼은 그렇게 위로했어야 했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든 산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은 붕어빵 산적 아저씨였다.
물 밖에서 뜨겁게 파닥이는 붕어가 2 마리에 천 원이란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유세를 부리던 붕어빵의 추억이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다.
붕어는 물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