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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의 또 다른 이름...그리움!

by 김석철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땐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 어제로 밀어 넣은 날, 종일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마늘, 양파를 심어야 되는데, 올 해는 손가락 하나도 꼼지락거리기가 귀챦아 내일, 내일 핑계를 대는 사이에 모종으로 사둔 양파 잎사귀가 누렇게 찌들고 있다.
비 새는 한 평의 작업실에 앉아 땅콩을 깐다. 낚시에 버금갈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순간이다.

몇 해 전, 거의 매일 같이 농장으로 퇴근해서 열 시 반 타이머에 맞춰 둔 전등이 꺼지면 귀가를 하는 다소 눈치가 없는 이웃 사내가 있었다.
칼치 한 박스를 사서 집에서 손질하고 조금 가져왔다면서 까만 비닐 봉다리를 쑥 건넸다.
내가 못 먹고 죽은 귀신이 씐 인간도 아니고, 칼치 한 마리 변변히 사 먹을 형편도 못 되는 껄뱅이는 더더욱 아닌데,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놀리나 싶은 것이 순간 부아가 확 치밀어 올랐다.
가뜩이나 나잇살 먹으가며 잔챙이가 되어가는 인간에게 염장을 지르자는 것도 아닐테고.
열어 본 봉투 안의 칼치는 죄다 창자 빼낸 새까만 뱃때지 부분과 꼬랑지 부위만 잔뜩 들어있고, 살점 붙은 몸통 부분이라곤 단 한 점도 찾아볼수 없었다.
준 사람의 성의고 나발이고, 고양이 간식거리로 주기에도 열불이 터져 사정없이 두엄통에 패대기를 쳐 버렸다.


여덟 시. 출근길에 커피나 한잔 얻어 마실까 싶어 절친인 거래처 매장에 잠시 들렀다.
커피가 반 잔쯤 비워졌을 즈음 낚시복장을 한 이가 다급히 문을 훽 열더니, 밤낚시로 잡은 칼치라며 큼지막한 시커먼 비닐 봉다리를 던지듯이 건네주고는 표표히 사라졌다. 그놈의 까만 비닐 봉다리가 늘 화근이다.
"아, 이런 거를 말라꼬(뭐 하려고)가 오노(가져 오나)! 손질하기 올매나 구챦은데...아파트 냄새 다 뻬이구로(베이게)."
나란 존재를 까맣게 잊은 형수님은 발작하듯 닫힌 문을 향해 말했다.
쓰윽 쳐다보는 눈길을 피해 손과 머리를 휘휘 저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동기야 어떻든, 상대편을 고려하지 않은 성의는 감사가 아니라 오히려 원망을 불렀다.
'공감'이 부족한 위로나 격려는 그닥 감흥을 주지 못한다. 차라리 침묵이 훨씬 낫다.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밤, 짜달스레 할 짓이 없는 돌쇠아재의 밤은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땅콩 까는 소리만 짙어진다.
땅콩으로 가득 채워진 지퍼백에 이름들이 새겨진다. 이름 보다 먼저 얼굴이 그려지고, 그리움이 새겨진다.

올해도 꽤나 긴 밤을 땅콩이나 까면서 지새야겠다.
사랑하는 친구 조가야, 쐬주 좀 줄이고.
땅콩 안주가 최고라는 한마디에, 내 밤도 짧아진단다. 비도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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