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에, 친구의 친구를 구공탄 보다 뜨겁게 사랑한 비련의 주인공인 친구가 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세월의 강을 넘지 못하고 한발 정도 미련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망각의 해답은 시간이라는데, 이 새드앤딩의 스토리엔 해당 사항이 못되나 보다.
어머니라는 걸림돌 앞에서 야무지게 엎어져버린 것이다. 목전에서 죽어버릴 거라고 차량을 담벼락으로 돌진시켜 병원 신세를 지는 후레자식 반항도 했다. 그녀 아니면 살아도 산 게 아니라며 읍소와 구걸도 했다. 결국, 모든 스토리의 막장은 '도피' 인데, 이 사랑에 눈이 먼 친구 역시 같은 시나리오를 썼다. 엄동설한에 남의 비닐하우스에 도둑괭이처럼 숨어들어 밤새 오들 거리며 오롯이 체온으로만 긴 겨울밤을 넘긴, 눈물 없인 듣기 힘든 순애보. 새드앤딩이라 더욱 저린지도 모르겠다.
술이 지랄 같은 건, 묻어 둔 기억들을 들쑤셔 끄집어낸다는 거다. 신은 망각이란 큰 선물을 주고, 술은 신의 자비를 사정없이 비웃는다.
얼마 전 모임에서 실로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비련의 주인공 놈은 사시나무 흔들리듯 요동을 쳤고, 아니나 다를까 술은 놈의 기억을 소환해 답도 없는 넋두리와 러버스토리를 밤새 재연 시켰다. 주정과 눈물로 죄 없는 친구들을 고문했지만, 남의 인생사에 별 관심이 없는 우리의 벗들은 그냥, 잤다.
사랑보다 질긴 감정은 '미련'이다. 비련의 미련한 이 친구 놈은 미련이란 죄목의 무기징역을 사는 중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왜 그렇게 어머니의 반대가 심한지 물은 적이 있다.
" 그냥!"
니미, 그냥이란다 그냥! 그 어떤 조건이나 이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어, 그냥.
세상에서 이보다 단호하면서도 잔인한 단어가 있을까? 조건이나 이유가 없으니, 타협이라든지 설득 이딴 건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과묵해서 결혼했는데 사는 게 재미없고 답답해 죽겠다며 징징댄다. 어떤 이는 활달하다 평하는데, 어떤 이는 경망스럽다 한다. 조건, 이유 이런 건 늘 가변적이다. 그러나, '그냥'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냥 좋다는데 누가 이길 것이며, 그냥 싫다는데 뉘라서 말리겠냐고.
내 딸은 '그냥' 사랑을 했음 좋겠다. 내 아들은 '그냥' 따뜻하고 정의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나는......'그냥' 자유로왔음 좋겠다!
내가 사는 이유도,
'그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