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농부의 밭에 황량함만 남겨졌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팔랑이는 비닐이 바람과 함께 저 보다 앞서서 바싹 마른 콩대들을 몰아놓았습니다.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땐다는 삼국지의 한 싯귀가 문득 생각나는 건, 쭉정이만 앙상한 콩대를 겨우내 군고구마를 위한 불쏘시게로 삼을 요량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의 날에는 한동안 땅콩껍질을 까면서 그리운 이들을 생각했지요. 행여 쭉정이에 삐집고 들어선 까만 콩이라도 있을까 또 한 번의 그리움으로 겨울밤을 지샐까 합니다.
콩대를 거두는 동안 이쁜이와 2세 똘만이 넷이 발치에서 까불거리며 방정을 떱니다. 내 밭에는 다섯의 고양이와 게으른 농부가 서로에게 이해하지 못할 대화만 나누고 있습니다. 바람도 한몫을 거들지만, 끼일 자리는 아닙니다.
나는, 농부입니다.
매운탕거리로 사둔 생선을 삶아 착한 똥개 용이에게 특식으로 주었습니다. 먹고잡이 괭이들이 호시탐탐 식탐을 드러내지만, 언감생심, 용이가 한번 쓰윽 째려보면 다가서지도 못하고 입맛만 다셔댑니다. 먹고 자고, 뛰놀고...늘어진 팔자가 부럽습니다. 애처롭기는 하지만, 오늘은 용이에게만 온전히 맛난 특식을 줄 겁니다. 쪼그려 앉아 쭈볏대는 용이에게 먹으라고 말합니다. 기다리던 용이가 좋다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후룩후룩 생선을 마시듯 삼킵니다. 애잔합니다. 착한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쓰다듬어주었습니다.
나는 농부이자 나쁜 구속자입니다.
오후에 손님들이 온다고 하니 쬐금은 서두르는 척을 합니다. 유난히 땅콩을 좋아하니, 깐 땅콩 두 봉을 챙깁니다. 두어 번 얼었다 녹은 배추는 쌈배추로 일품이니 몇 포기도 챙겨 주려고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누가 줬는지도 잊고 있었던 홍시도 있었네요. 말랑하게 뜸이 잘 든 녀석으로 여섯 개를 챙깁니다. 게으른 농부의 몫으로도 두 개 정도는 꼬불쳐 놓는 건 괜찮을 테지요.
둘둘 대충 말은 콩대를 하우스 한 켠에 아무렇게 던져놓습니다. 오늘은 콩을 까부릴 마음이 조금도 없거든요. 겨울밤은 깁니다. 생각나는 그리운 이름도 많습니다. 모르긴 해도 올 겨울을 넘기지 않고 콩은 다 까게 될 겁니다.
오랜만에 농꾼이 된 날,
나는 뱃속이 편한 농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