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영은 매일 퇴근 전 산하와 지석이 보낸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궁금한 내용이나 추가해야 될 사항들을 답장으로 보내었다. 산하는 메일을 보내면서 현지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한 두장씩 같이 보내 주었는데 사람은 없고 예쁜 풍경 사진이나 상품 사진들 뿐이었지만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뜻으로 보내는 것이기에 사진을 받는 찬영은 기분이 좋았다.
패션의 중심인 만큼 다양한 편집샵들이 있었고 그 샵 주인장에 따라 판매되는 상품 구성이 무척 다양했다.
출장기간 내내 밀라노라는 도시 모든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특별하거나 괜찮다고 생각되는 샵에 일일이 들어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스타일을 보기도 하고 빈티지 샵에서는 판매되는 디자인 중 재 해석을 통해 신규 브랜드에 적용할 만한 아이템들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밀라노에 있는 다양한 명품 브랜드 샵에는 국내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디자인들이 꽤 있어 패션에 관심이 많은 고객들 니즈를 맞추려면 이런 곳도 필수 방문 장소중 하나이다. 명품 샵을 방문할 때면 가장 나이 어린 희수는 정신 놓고 구경을 하다가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패션은 매년 트렌드에 맞는 상품들을 출시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브랜드를 대표하는 클래식한 아이템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들도 필요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이 똑같이 흘렀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태어나 가장 길고 지루했던 시간이 지났다. 지난 며칠 동안 까칠했던 상사가 내일이면 출장은 갔던 연인이 돌아오기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을 김선호 차장만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시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구내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찬영과 전략팀 직원들 모습을 디자인팀 고연희 과장은 우연히 보게 되었다.
디자인 팀장 공석으로 차기 팀장 자리를 노리고 있던 연희는 김지은 실장과 윤찬영 상무를 놓고 어느 쪽을 공략할지 저울질을 하고 있었는데 해외 출장과 TFT 모두 강지안 대리가 선택돼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승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윤찬영 상무를 만나고 싶었지만 지난번 회의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만날 방법이 없어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보게 된 것이다. 그와 만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제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을 거라 어설픈 생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르고 몸을 먼저 움직였다.
음식을 받아 든 찬영과 선호가 테이블로 이동을 하려는데 연희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상무님 오늘은 구내식당에서 식사하시나 봐요?"
무척이나 친근한 관계라고 생각할 만큼 낭창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기에 식당에 있던 모든 직원들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쏠렸다. 직원들이 의례적으로 해오는 가벼운 인사라 생각한 찬영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말없이 연희 옆을 지나치는데 그녀가 몸을 찬영쪽으로 바짝 붙이면 어쭙잖게 따라붙었다.
"상무님 전략팀 하고 기획팀이랑 회식했다고 들었는데 저희 디자인팀이랑은 언제 회식해요?"
자신에게 지나치게 추근거리고 있다고 느낀 찬영이 가던 길을 멈춰 서서는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식판을 내려놓으면서 서늘한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되었다는 듯 시선이 모아졌다.
"김선호 차장 이 사람 누굽니까?"
"디자인팀 고연희 과장입니다"
말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연희를 훑어보던 찬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연희 과장,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어디서 친한 척입니까!
회식을 하고 싶으면 디자인팀 관리하고 있는 김지은 실장한테 말을 해야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합니까.
지금 치근댄 것은 구두 경고로 끝내지만 한 번만 더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을 걸거나 아는 척하면 그날로 바로 해고입니다. 김선호 차장 지금 내가 한 말 인사 팀장한테 그대로 전해요"
김선호 차장이 알겠다는 대답을 하자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제 식판을 뒤에 서 있던 전략팀 직원에게 건네주고 식당을 나갔다. 김선호 차장도 제 식판을 뒤에 서 있던 다른 직원에게 넘기고는 찬영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식당은 북극을 옮겨 놓은 것처럼 냉기가 흘렀고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고는 각자 식사를 이어갔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연희는 식사를 매충 끝내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식당을 나와 사무실로 그냥 올라가려고 하는 찬영을 선호가 붙잡았다.
"저랑 밖에 나가서 식사하고 들어 오세요"
찬영이 먹지 않겠다는 뜻으로 머리를 흔들자 선호가 한숨을 쉬었다.
"회사 직원 삼분의 이가 있는 데서 말했으니까 뒷 말은 없을 겁니다.
팀장들 통해서 직원들 입단속도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식사하러 안 가시면 서. 산. 하. 대. 리. 출장에서 돌아오면 식사 제대로 안 하셨다고 말할 겁니다"
산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정확한 딕션으로 당당히 말하는 김선호 차장을 찬영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자 선호는 그를 끌고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면서 선호는 팀장들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 구내식당의 일에 대해 말 돌지 않게 직원들 입단속하라는 메시지를 올렸다.
식당에서의 일이야 칼로 베어 내듯 현장에서 끝장을 봤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알콩달콩 한창 좋은 시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제 상사가 애정 하는 연인이 출근하자마자 이런 소식을 들으면 기분 좋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팀장들을 다 그치고 있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회사 일층 카페에서 차를 마시던 찬영이 선호에게 물었다.
"김선호 차장은 어떻게 알았어요?"
선호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바로 답을 했다.
"상무님이 구내식당에서 굳이! 서산하 대리한테 가서 인사할 때 예상했죠. 아! 뭐가 있구나.
그렇게 생각만 했었는데 그 일 있고 며칠 안 지나서부터 상무님 얼굴 표정이 달라지셨어요.
전보다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래서 확신했습니다"
차를 마시던 찬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카페 유리창 밖에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봤다.
내일이면 산하를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기분이 구내식당 일로 이보다 더 나쁠 수 없게 다운되었다.
그때 핸드폰 메시지 알림 진동이 울려 핸드폰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터치하니 기획팀 이희수 사원이라는 텍스트가 보였고 그 아래로 산하 사진이 전송되어 있었다. 몰래 사진을 찍어 자신에게 보낸 듯했다. 자신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사진 속 산하는 노천카페에서 손에 탭을 들고 무언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패션의 기본인 화이트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긴 머리카락은 로우 번으로 묶은 모습이었다.
제 허락 없이 연락처를 알려준 사람을 찾아서 한 소리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사진 감상이 먼저였다.
선호는 핸드폰을 보면서 웃고는 찬영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무실에서 찬영은 김지은 실장과 인사 팀장과 함께 디자인 팀 직원들에 대한 회사 내 평판과 인사 파일을 같이 확인했다. 인사파일에서 고연희는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디자인 실적이나 스케치 자료 및 직원 평판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인사 평가 시 팀장 개인 의견이 일정 부분 반영될 수 있지만 객관적인 업무 점수와 차이가 크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회의를 마친 찬영은 지은과 인사 팀장을 내보내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는 칼부림이 일어날 날이 멀지 않은 듯했다.
구내식당 일이 이미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연희는 화장실 가기에도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입사한 지 오 년이나 되었기에 찬영에 대한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것을 쉽게 이뤘기에 그도 어렵지 않게 제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망신만 당한 꼴이어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스스로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는 알지 못한 채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지만 디자인 팀 직원들도 속으로 제 욕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열이 올랐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어 짜증만 날 뿐이었다.
김지은 실장은 식당일도 있고 찬영 사무실에서 했던 회의를 통해 알게 된 내용도 있고 해서 고연희 과장을 기획팀 사무실로 불렀다. 회사 다닌 연차도 꽤 되는 사람이 찬영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들이댔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김지은 실장에게서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은 연희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지은 책상 건너편에 앉았다.
지은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그녀를 훑어보았다.
키보드 소리 외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기획팀 사무실 공기에 숨 막힐 듯 한 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 있어서 부르신 거 아닌가요?"
김지은 실장은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천천히 세우면서 말했다.
"점심시간 일로 쪽 팔리고 망신스럽겠지만 잘 버텨 봐요.
몇 년이나 다닌 회사에서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관두면 아깝잖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다닐 생각입니다"
"그래요 얼마나 버틸지 나도 궁금하네. 몇 가지 말해 둘 게 있어서 오라고 했어요.
회식하고 싶으면 다른 데다 말하지 말고 우리 기획팀 김두철 대리한테 일주일 전에 얘기만 해요 그러면 언제든지 회식시켜줄 테니까. 엄한 사람한테 가서 그런 얘기해서 책임자인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란 얘기예요.
하나 더 이건 경고예요!
본인 직위 앞 세워 직원들한테 위세 부리지 말아요.
지금까지 디자인 팀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나는 관심 없어요.
내가 관리를 맞는 동안에는 직급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하고 공평하게 평가받을 거예요. 직급은 높을수록 일을 더 많이 해야 되는 거예요 아랫사람을 부려먹는 게 아니라.
나 그런 거 되게 싫어해요!"
할 말을 마친 김지은 실장은 연희에게 가보라고 말을 하고는 기획팀 사무실을 벗어나는 그녀 모습을 지켜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직장 생활하면 흔히 볼 수 있는 케이스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이용해 능력 이상으로 잘 나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들을 경계하고 따돌린다.
좋은 조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성향을 가진 직원이다.
기획팀 직원 모두가 두 사람 대화 내용을 들었다.
김지은 실장이 고연희 과장에게 말하는 모습을 본 팀원들은 자신들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시니컬한 모습에 모두 깜짝 놀랐다.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못하던 팀원들은 고연희 과장이 사무실을 나가자 작게 한 숨을 내 쉬었다.
다사다난했던 하루 일과가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되자 직원들은 썰물 빠지 듯 퇴근을 서둘렀다.
기획팀은 출장으로 인해 생긴 공백이 오늘로 끝나게 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시 퇴근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일찍 퇴근을 하면서 날씨 좋은 오 월 금요일 밤에 삼삼오오 모여 다들 한 잔을 하러 가는 모습이었다.
이 글은 제가 창작한 이야기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지만 재미있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