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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Apr 27. 2022

깊은 슬픔

존재에 얹혀진 무거움

  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 치고는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비이다. 짙은 먹구름 때문에 사위는 조금 어둑하고 내리는 빗소리가 투둑 투둑 들릴 만큼 사방이 고요하다. 창문 밖을 보니 이제 막 꽃송이가 벌어지려고 하는 라일락의 보라색 꽃잎과 키 작은 홍매화의 빨간 꽃송이에도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꽃잎과 여린 나뭇잎들을 줄곧 떨게 하고 있다. 여기저기 패인 조그만 웅덩이에는 빗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동그란 원을 만들고 내 마음 속에도 왠지 끝없는 동심원이 만들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창문 옆에 서서 오랫동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자니까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진다. 비를 유독 좋아하는 나이지만 계속 그 비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슬퍼진다. 무슨 핑계거리라도 있으면 그냥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때에 느껴지는 슬픔은 애잔하기는 해도 미칠 듯이 고통스러운 그런 슬픔하고는 거리가 멀다. 어떤 달콤한, 멜랑콜리한 슬픔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존재의 저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 올라오는,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상실감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슬픔은 기회가 있기만 하면 어떤 틈이든지 비집고 올라와 한번 씩 우리를 건드리고 간다. 그리곤 멀리멀리, 현실 밖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일상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그 깨어 있는 순간동안 부단하게 생각이란 걸 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먹고, 자고, 쉬고, 일해야 하는 육체적 조건과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의 끈을 놓쳐버리고 만다. 별다른 생각 없이 이러한 습관적 생활에 빠져 있는 나는 어쩌면 진정한 ‘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하고 느끼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때에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나의 눈이 열리고 감각은 생생해지고 사물이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럴 때에 나는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살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순간은 그렇게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해내야 하는 수많은 일과들이 그렇게 한가한 나만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의 습관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지만 현실은 일상적이고 진부하고 시시한 것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 다시 ‘나’로 돌아왔을 때 어떨 때는 몹시도 지독한 슬픔으로 몸서리칠 때도 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허무하고 이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깊은 슬픔’이라고 부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이 나를 온통 감싸고 있을 때,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상처에 매몰되어 있을 때가 그런 순간들이다. 어떤 때는 이러한 깊은 슬픔과 맞닥뜨리기가 무서워서 이러한 고요와 사색의 시간으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쳐서 의미 없는 일들에 내 자신을 함몰시키려 애쓸 때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들, 예를 들어 tv프로나 뒤죽박죽 들려오는 음악이나 사람들과의 의미 없는 수다에 온 몸을 바칠 듯 탐닉해서 그것만이 전부인 냥,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인 냥 살아간다. 그러나 가슴 속의 알 수 없는 욕구가 나를 고요와 침잠의 시간으로 이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 굴복하고 만다.     


 사방이 꽉 막혀버린 벽 속에,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느낌이 들 때, 내 자신 별로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뭔가 커다란 바위 같은 것이 뒤에서 날라 와서 내 머리통을 때리고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머리를 싸매고 바닥에 나뒹군다. 불운은 연속되고 세상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나를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차가운 눈초리들만이 내 주위에서 나를 쏘아보고 있다.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하다. 이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다 나에게로 몰려와서 나를 결단내려고 하는 것 같다. 믿었던 사람마저 등을 돌리고 발밑에 있던 땅은 여기저기서 내려 앉아 곧 땅속으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은 것이다.     


  너무나 어이없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비명도 내지를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또 어쩌면 느닷없는 불행이 남들의 조롱거리가 될까 보아 그것을 내 스스로 숨겨야만 하는 그런 끔찍한 상황이다. 슬픔에 압도당하는 순간에는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까지 의미 있었던 모든 것들이 그 모든 의미들을 떨쳐내고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변한 채 징그러운 이빨을 드러내고 비웃듯 나를 쳐다본다. 나는 빈껍데기가 되어 존재를 부정 당한다. 세상이 나를 하찮은 티끌조각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에는 어쩌면 죽음만이, 내 손으로 내 존재를 무로 되돌리는 것만이 이 상황의 유일한 타개책인 것처럼 보인다. 죽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목으로 기어 올라와서 하루 종일 그 생각으로부터 놓여나기 힘들만큼 모든 것이 절망 그 자체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상상의 세계로 몰입하지 않고 존재의 불가피한 고통과 불행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과 고결한 성품을 기르는 것만이 가치 있는 삶이다.” 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고통에 울부짖거나 가슴을 쥐어뜯지 않고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라는 건 어불성설에 가깝다. 우리는 그럴 때 발버둥치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등 절망적인 몸부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오랫동안 온갖 혼란을 겪은 후에야 그것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에 나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쓴다. 이 ‘깊은 슬픔’의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해결할 래야 할 수 없는 불능의 상태인가, 아니면 이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원초적 상황에 속한 것이라서 그냥 체념하며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심연 속에서 빛나는 그 어떤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 암중모색하는 것이다. 이렇게 ‘깊은 슬픔’의 바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에 내 존재는 금새라도 부서져 버릴 듯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조금씩 샘솟듯 솟아나오는 저항과 극복의 의지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모든 슬픔의 파도가 내게 덮쳐 와서 나를 깊은 바다 속에 빠뜨릴 것 같다가도 온몸으로 발버둥을 치다 보면 어느새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른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 태양은 눈부신 미소로 내게 말을 걸고 몸을 추슬러서 걸어 나가면 금방 닿을 듯한 해안가가 저 앞에 보인다.     


  때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깊은 슬픔’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기도 한다. 그 상황 속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참기 어려운 모멸감과 치욕과 절망, 수모로 죽을 만큼 괴롭기만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든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이상하리만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머릿속이 맑아지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맞부딪쳐서 고민하며 싸워 이겨낸 역경은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치유와 힐링이 되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어떤 해답이 우리 삶을 정화시키고 나아가게 하며 우리를 다시 힘찬 도약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도전에서 싸워 이겨냈다는 느낌, 어떤 해답을 기어코 찾아냈다는 느낌이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한층 성숙한 나로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깊은 슬픔에 당당하게 맞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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