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시간이 고통이었어."
노트를 펼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나는, 그날을 되짚어 보았다.
여기 이방은 누가 쓰시는 거죠?
나는 엄마가 들으라는 식으로 일부러 더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요.
아, 그럼 딱 맞겠네요. 바로 앞
베란다에서 화분 키울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깐요.
엄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지만,
내 안에서는 작은 희열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엄마가 기분 나빠하는 포인트를 말이다.
남편이 물었다.
자, 방을 정하자.
안방 옆에 작은 방을 누가 쓸 거지?
엄마와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면 화장실 옆방은?
그 방은 내가.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어머님은요? 어느 방 쓰시겠어요?
나는 엄마의 말을 가로채고,
나는 엄마랑 같이 나란히 방을 쓰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저 미닫이 문 사이로 엄마가 옆에 있다는 게
싫어. 사생활 보호를 침해하는 거 같아.
나는 매우 불쾌하듯이 말했다.
남편은 이 사태를 감지하듯,
일단 밥을 먹으러 가자. 거기서 다시
이야기하자.
오빠와 엄마는 냉메밀, 나는 쫄면.
음식이 나오고,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서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
아무 방이나.. 쓸게요..
엄마는 세상 쓸쓸한 표정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빠와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오빠의 표정이 살짝 구겨지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말을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요..
그리고 나도 이어 말했다.
맞아, 엄마.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엄마는 자신의 마음이 오빠에게 들켰다는 게
창피한 듯, 말을 하다가 입을 닫아버렸다.
아.. 그..
엄마와 나는 마트에 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엄마.. 나.. 로션이 없어..
엄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신경질적인 어투로
내 말에 답했다.
정말 없어?
응.. 할머니가.. 다 몰래 다 썼어..
몇 초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뭔가 필요하다고 엄마에게 사달라고 하는 게
나한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특히 엄마는 기분에 따라서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면, 쿨하게 사주기도 했고, 오늘처럼
싸늘하게 사주기도 한다. 아니면 무시하고, 사주지 않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습관이 된 것이.
최악의 상황은,
전날 아빠에게 많이 맞고, 할머니랑 싸운 날에
이렇게 내가 뭔가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은,
자폭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그날에는 하루 종일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꾸지람은 물론이고, 혼나고 또 혼나야 되는
날이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청소를 하면서 이유 없이 고함을 빽빽 지르기도 한다.
지금 엄마를 보면, 제정신으로 살날이 없었던 것도 같다.
늘 미쳐있었고, 화나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기분만 바라보면서 꼭 필요한걸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솔직히 로션도.. 한참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겨우
꺼낸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끔찍하게 엄마를 증오했던 것은..
도련님, 오늘도 도련님 좋아하는 김치찌개 해놓았어요.
오세요.
동서, 오늘 민지하고, 집에 와. 맛있는 거 해놨어.
와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주버님은 오늘 일찍 퇴근하셔?
혹시 늦어도 된다고, 도착하는 데로 집으로 오라고 해.
엄마는 또 신나 있었다.
엄마가 저렇게 친척들을 부를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나에게도.. 조금만 저렇게 상냥하게 얘기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과.. 바람이 나를 아프게 했다.
그리고 친척들이 가고 나면 혼자 치워야 하는
어마어마한 설거지들을 할 때, 엄마는 혼자서
화를 냈다. 막 소리를 지르고, 나를 불렀다가..
또, 할머니를 불렀다가..
누구에게 그렇게 저 여자는 화가 난 것일까.
툭-
한가득 장을 보고, 갑자기 짜증이 확 섞인 표정으로
내방으로 곧장 가서 문을 확 하고 열었다.
어머님, 제발 좀 정아 로션 좀 쓰지 마세요!!
엄마는 공격적인 어투로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무시했다.
그리고 엄마는 내 화장품을 확인했다.
한 3일 정도 더 쓸 수 있는 로션의 양을 보고,
엄마는 또 한 번 화를 냈다.
야, 김정아!!! 엄마가 아까도 물었지 정말 없냐고!!
이건 뭔데?
엄마는 쏘아붙혔다.
나는 기가 팍 죽어서,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부터는 완전히 없어야 사줄 거야 알겠어?
엄마의 목소리는 내 귀에 가시처럼 꽂혀서
피가 났다.
엄마는 내 방문을 확 닫았다.
쾅-
으유~ 고약한 년.. 네 아빠는 어디서 저런 년
을 데리고 왔다니?
할머니는 문이 닫히자마자,
내가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