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폭력.

by 서온

하얀색 물체가 언젠가부터,

계속 나를 따라다닌다.

불이 꺼지면 여김 없이

그 하얀 물체는 나를 유혹한다.

"죽어."


다리가 긴 의자와 늘어진 하얀 물체.


꿈을 꿨다.

술에 취한 내가 편의점 앞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남자가 편의점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남자는 나를 계속 주시했다.

나는 그 남자의 시선에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고 정신을 잡고,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내 뒤를 밟기 시작했다.

나는 폰을 들고 다급히 11... 11...

왜 하필 그 쉬운 번호가 생각이 나질 않았을까.

역시 꿈이어서 그런 걸까.

기어코 나는 생각해 냈다.

119..

"어떤 남자가 저를 납치하려고 해요! 여기 00동이고요,

도로변에 있습니다!"


알겠다고, 출발하겠다고

수화기 너머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생사가 오고 가고 있는데,

수화기 안에 있는 소방대원은,

매우 차분했고, 무심한 말투였다.


생각해 보니, 왜 112가 아니고, 119였을까.

보통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112가 아니던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남자는 속도의 변화도 없이,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매우 빠른 걸음으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뛰었고,

그 남자는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나를 쫓아오고 있던가.

나는 눈을 떴고,

나는 잡히지 않았고,

납치가 되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그 남자에게 납치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남자는

나를 죽였을까?

"야, 이 씨발년아. 밥 안 차려?"


구분이 가질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눈은 깜박였나, 내 손가락은

움직이고 있나, 감각에 집중을

하려 애썼다.


베란다 너머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이 내 눈을

찡그리게 했다.

순간 눈을 찡그렸는데, 멍든 나의

눈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한 여름의 더운 바람이

나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바람만 스쳤을 뿐인데,

온몸이 아프다.


그러다 내 시선에 들어온 에어컨.

365일 에어컨은 저 자리 그대로지만,

자신의 역할 따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잊어버렸을지도.


에어컨은 나를 보며,

동정한다.

그래서 내가 에어컨을 보며 말했다.

"쳐다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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