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장소 : 유성구 작은 도서관 기행 (5)
학교 서문에서 타슈를 타고 대로를 따라 내려가 한빛 아파트에 도착했다. 지도상으로는 도서관이 아파트 앞 상가에 있다고 했다. 호기롭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가 흠칫 놀랐다. 상가의 규모가 너무 컸다. 아파트 앞에 있는 상점 건물이 으레 그러듯 마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트와 과일가게, 수선집, 심지어는 옷 가게와 화장품 가게까지. 커다란 네모 공간 안에 이것저것 가득 차 있는 5층 자리 건물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듯했다. 바깥과 내부를 번갈아 확인하며 필사적으로 의구심을 풀어보고자 했다. ‘도대체! 아파트 단지 하나밖에 없는 이 길목에! 이 규모의 상점이 유지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녔다. 들끓는 호기심을 물리고 가까스로 층별 안내도를 찾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도서관이 없었다. 아무래도 지도상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덕분에 생애 꼽을 만큼 강한 호기심을 경험했다.
지도상 표기된 전화번호로 도서관에 전화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2층에 위치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건물을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를 마주했다. 내부로 걸어 들어가면서 좀 전의 호기심은 연장되었다. 아파트 단지가 마을처럼 넓고 깊었다. 요즘처럼 작은 부지에 높은 아파트를 짓는-앞 세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 같은-건물들과 대조했을 때는 ‘방대하다’라는 표현이 적합해 보였다. 이런 곳이라면, 아까 관찰한 기이한 상가 건물 존립의 타당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파트 약도를 보고 찾아가 가까스로 도착한 도서관의 모습은 황당했다. 보관 중인 장서가 1만 3천 권이다. 작은 도서관 평균 장서 수는 5천 권 남짓이다. 뿐만 아니었다. 최근에 들인 도서나, 10년 전에 들인 도서나 할 것 없이 고루 사람 손 때가 타 있었다. 덕지덕지 흔적이 남아있다. 신기한 일이었다.
선생님과 몇 마디를 나눈 후였다. 나에게 “대전 분 아니시죠?”라고 물으셨다. 대전 사람이라면 이 한빛 아파트가 대전에서 세대 건물이 가장 많은 것은 알고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20년 전에 준공된 이 아파트 단지가 주변 연구원들과 교수들의 거주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 때문에 이 문고는 유독 큰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연구원의 자녀들이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방문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신경 쓴 것이다. 작은 도서관이지만 ‘도서 자문 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구입할 도서를 선정하고, 장서를 들이게 될 때 그를 검수하고 정리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20년 동안 신중하게 엄선한 좋은 책들로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 이 도서관이다. 실제로 도서관을 보면 도서관의 역사가 한눈에 읽히는 거 같아 장소에서 오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도서관에는 특이점이 있다. 책을 빌리기 위해서는 이용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은 400원, 아이는 100원이다. 마치 옛날 동네 만화방에서 책을 빌리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떠올리게 하는 금액이었다. 이용료를 받는 이유는, ‘책을 빌릴 때의 책임감’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용료를 지불하니, 책을 더욱 깨끗하게 보고 7일이라는 대출 기한을 넘기지 않고 반납하기에 회수율이 높다. 연체가 되면 이틀에 100원이라는 연체료가 붙는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도서관에서-심지어는 아파트 내부에 위치한- 책을 빌리는데 이용료가 붙는다는 것에 조금의 반발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엄선된 좋은 도서를 가까운 곳에서 빌릴 수 있는 데에 그만큼의 투자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민들의 의견인 듯했다. 문고가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이용료가 있었고,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입주민 분들은 금액을 달아 둔다. 아이들이, 혹은 함께 언제든 와서 책을 빌릴 수 있도록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모인 이용료는 도서구입비에 보탬이 된다.
도서관 봉사자 선생님은 책을 사랑하신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물으면 ‘책 읽기’,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물으면 ‘하루 종일 책 읽기’라고 답하실 거 같았다. 선생님은 자녀가 어렸을 때 이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어줬다는 이야기를 풀어 주셨다. 공책에는 '좋은 청소년 책 리스트'가 빼곡하고, 정말 재미있는 책은 직접 여러 번 읽어보고 신이 나 아이들에게 소개했다. 한 번은 같은 책을 세 번 빌려 간 적이 있다고 하셨다. 아이가 흥미 없이 여기다가 엄마가 세 번째 빌려온 날,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길래 그러지?’라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는 밤새 이어졌다.
“아파트 내 작은 도서관이 계속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나의 물음에 선생님은 이용자가 10명 남짓이더라도, 운영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충분히 운영될 수 있으며, 운영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삶의 꽤 많은 비중을 도서관과 함께 보내며 단지 내 도서관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 생기신 거 같았다.
첫째로는 새로운 커뮤니티가 형성된다. 단지 내 문고 같은 경우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다. 오던 사람만 온다. 그렇게 방문 일수가 늘어나고, 익숙한 얼굴들이 생기며, 소통하게 된다. 입주민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도서관은 종종 근황 토크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요즘 무얼 자주 먹고, 우리 애가 어떤 걸 하며… 등등의 것을 공유한다. 진정한 동네 친구가 아닌가. 둘째, 아이들이 책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집과 문고의 거리가 가깝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5분 내로, 무려 만 권 이상의 책이 있는 공간에 다다를 수 있다. 끌리는 제목을 찾아 읽다 흥미가 식으면 옆에 또 다른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읽으면 된다. 아파트 내 문고는 책에 대한 탁월한 근접성을 가진다. 여러 흥미가 익고 식는 과정을 거쳐 재미있는 독서의 맛을 알기에 좋은 입지이다.
책을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주제도, 갈래도 취향에 따라, 필요에 따라 여러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책은 식재료, 독서는 요리와 같다. 주어진 재료는 많다. 엄마 혹은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방법으로 조리할 수도, 내가 만든 레시피로 요리할 수도 있다. 여러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나만의 맛을 찾는다. 독서의 재미를 찾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이 경험을 가장 쉽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곳은 집과 가장 가까운 주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