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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직남 Jan 07. 2024

빨간 달력, 1년 후

단편소설집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장은 어제 골프 라운딩에서 80이라는 마지노선을 넘어선 자신의 비극적인 공의 개수에 좌절한 채 열심히 골프 채널을 시청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자신을 다독이면서.   


응. 말해.  


한 달만 쉬겠습니다.  


그의 미간이 자동으로 짜부라졌다. 사장들은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단어가 있다. 보너스. 회식. 휴가. 그 셋 중에서 가장 최악은 휴가였다. 누군가 휴가를 떠난다는 건 그 자리가 공석이 된다는 의미였고 그 공석을 누군가 메꿔야 함을 의미했다. 2인 분이 된 업무량에(실제로 그런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투덜 될 것이고 그게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게 싫었다. 지금, 자신을 찾아온 이 직원이 최악의 단어를 말했고 게다가 한 달.이라는 명확한 기간을 명시했다. 직원을 똑바로 쳐다도 보기 전에 그의 눈은 불타는 화로대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 봐라. 


레이저를 쏘아대기 위해 직원을 바라봤을 때 마주한 결의에 찬 직원의 눈빛에 그는 곧바로 '달래는 모드'로 표정을 바꿔야 했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28년의 노하우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사장이라도 할 수 있는 대사가 별로 없다. 너무 완고해 설득의 요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 자리는 이미 직사각형의 두꺼운 종이로 막혀있었다.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달력같았다) 그것은 그의 결연함을 뒷받침할 물건이겠지. 법정에서 무혐의를 주장하기 위해 가지고 온 증거물처럼. 그래도 그는 물어야 했다. 사장이니까.  


왜 갑자기, 그것도 한 달이나 쉰다는 거지? 


직원은 덤덤이, 아주 덤덤이.  


빨간날이거든요. 

빨간날?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직원은 겨드랑이에서 토르가 묠니르를 다루듯 가볍게 빳빳한 종이를 꺼내고는(그것은 추측대로 달력이었다) 사장에게 건넸다. 사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종이 달력을(정확히 말하면 탁상 달력이었다) 손에 쥐어보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하단 로고를 보니 잘 아는 업체였다. 그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종이를 한 장씩 차근차근 넘기기 시작했다.  


12월을 봐주세요.

 

직원이 답답했는지 혹은 빠른 진행을 원했는지 그에게 알려주었다. 스륵스륵. 사장이 설악산에서 벚꽃나무, 광안리 해변을 지나, 11월의 불빛으로 수 놓인 도시의 전경을 넘기자 비로소 12월이 등장했다. 시뻘건 색으로 수놓인 숫자들로 가득한 12월을. 사장은 무슨 일인가 하고 인중을 가볍게 긁적였다. 어떤 일이 그의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 때 보이는 그만의 작은 습관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달력을 가져와 똑같이 스륵스륵 종이를 넘겨 12월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여섯 개의 빨간색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검정이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25일, 성탄절 정도. 그는 당황하지 않은 채, 


인쇄가 잘못 됐나 보군. 

그럴지도 모르죠.  


직원이 말했다. 당당하게.  


아니, 인쇄가 확실히 잘못된 게 맞아. 

그렇겠죠.  


사장이 물끄러미 직원을 바라보았다.  


자네, 지금 나랑 장난하나? 


직원은 처음으로 완고한 표정에서 이탈하고는 사장을 바라봤다. 공격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을 해명하기라도 하듯이.  


아닙니다. 저는 저와 일년 동안 함께해 온 달력을 따르고 싶을 따름이에요. 

그게 잘못됐는데도?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도 없고, 심지어 연차로 가득 채워야 하는데도?(그의 연차로도 그 31일을 다 채우기에는 불가능했다) 

네. 

내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면?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사장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진작에 나왔어야 할 단어가 등장했을 뿐. 그가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신기록이다. 보통 대화의 시작과 동시에 금단의 문장이 나오니까.  


자네, 여기서 일한지 얼마나 됐지?

5년 조금 안 됐습니다.   


사장은 그렇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젊고 유능한 직원이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당장 이 회사를 그만둬도 아쉬울 게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도 차지 않는 변명거리를 가져와서 내게 요구하는 걸까.  


도대체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지? 그냥 한 달 쉬고 싶다고 하면 되지 않나?  


이번에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강하게 가로저었다.  


단언컨대,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그냥 11월 말이 돼서 12월로 달력을 넘겼어요. 자연스럽게. 늘 하던 대로요. 근데 웬걸, 온통 빨간 날이지 않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1년 동안 이 친구와 함께 해 왔고 웬만해서는 이 친구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어요.  


사장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지만(도대체 왜 그딴 변명을 만들어 내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은 궁금증들을 모조리 싸잡아 목구멍으로 집어넣기로 했다. 28년 동안 회사를 운영하면 참으로 기이하고 기묘한 일들을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것이다)  


알았네. 그럼, 연차를 쓰고 나머지는 병가로 처리하자고. 그럼 12월 1일부터 안 나오는 건가? 

네. 12월 1일부터 31일까지. 1월 1일에 출근하겠습니다. 달력에 쓰인대로.   


그리고는, 다시 겨드랑이에 달력을 끼고(그것은 정확히 겨드랑이 사이가 칼집이라도 되는 거처럼 쏙 들어갔다) 사장실을 벗어났다. 


휴... 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11월부터 연말까지는 물량이 적은 주기였다. 그의 입장에서도 1인분의 월급이 줄어든 셈이다. 나쁘지 않은 거래일지도. 물론, 계속 반복되서는 안 되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드립을 내리고 남은 커피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온통 빨간 색인 12월이라...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지.. 


그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해당 달력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그 업체명은 이미 그의 휴대폰 연락처에 있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더니 업체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어이, 차사장! 웬일인가?

네, 박사장님. 잘지내셨나요? 


그는 늘 존칭으로 거래처를 대했다.  


다름이 아니라, 방금 저희 직원이 그쪽 업체 달력을 가지고 왔거든요. 

무슨 문제라요? 

다음 달인 12월 달력이 죄다 빨개서요.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러나왔다. 박사장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벌써, 1년이나 묵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종이 인쇄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기억력을 필수역량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 얕은 종이가 몇 백장 몇 천장인지 헤아려야 하니까.  


지사장, 미안하게 됐소. 우리 직원이 실수한 거였소. 

아... 그렇군요. 


역시, 실수였군.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잘못 파악한 게 아니라는 것에.  


새로 하나 보내주리다.


아닙니다. 그냥 확인차 전화했어요. 믿기지가 않아서요.

정말 미안하오. 사과의 표현으로 이번 연도 달력을 보내겠소. 


이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새해 달력은 조심해야겠네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나 혼자 하고 있으니 그럴 일 없을 거요. 내가 장담하지. 

그 직원은 어떻게 됐나요?

그만뒀소.

왜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박사장이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그 직원이, 어느 날 나에게 달력을 불쑥 내밀었소. 처음엔 디자인 시안을 봐달라는 건가 하고 천천히 한 장씩 넘겼지, 근데 1년 365일이 죄다 빨간색으로 수 놓여 있는 게 아니겠소.  


또 실수했나? 라고 물었지. 이미 전적이 있었으니까. 근데, 아닌 거야. 당신도 오래 일 해봐서 알잖소. 직원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난 그저 그 친구가 내뱉을 다음 말을 기다렸지. 그런데 한다는 말이 참... 기도 안 차지.  


뭐라고 했는데요? 


빨간 달력 때문에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사장은 그 얘기를 듣고 안도했다. 1월부터 12월까지 빨간색으로 수 놓인 달력이 자기 직원한테 전달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

현재 라이터스짐에서 관원을 모집 중입니다. 우리 같이 글근육을 키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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