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어느 번화가의 스탠딩바였는데 종종 글을 쓰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혼자 와서 하이볼을 깔짝깔짝 되곤 했거든요. 몇 잔 마시고 기분이 내키면 클럽을 가거나 했던 거예요. 운이 좋으면 여자를 만날 수도 있고요. 그날은 확실히 운이 좋은 날이었어요.
그녀 역시 혼자 왔으니까요.
혼자 온 여자를 마주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 기억에 남아요. 보통 여자들은 둘이서 오거든요. 둘이라는 숫자는 여자에게 안전한 숫자예요. 우연히(대부분은 기다렸다는 듯이) 셋이나 넷이 놀아도 좋고 그냥 둘이서 놀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둘인 여자들은 남자 입장에서도 다가가기 편해요. 어색함이 덜하고 각자 갈라지기도 쉽거든요.
그녀는 외모로 이목을 끄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어요. 내 주의를 끈 건 그녀의 얼굴도, 몸매도, 길쭉한 다리도 아니었어요. 그녀가 매고 온 핸드백에 주렁주렁 매달린 인형이었어요.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형들이 볏짚에 꿰인 조기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었거든요. 그 이름이 떠오르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헬로키티 – 맹구 – 쿠로미. 임을 알 수 있었어요. 말 그대로 유명한 캐릭터의 인형이었어요. 그런 대스타들이 그녀가 얘기할 때마다, 어깨가 흔들릴 때마다, 내게 인사를 건네듯 덩달아 흔들렸어요. 그게 여러 개다 보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요. 그래서 물어야 했어요. 아니,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죠.
그 인형들은 뭐야?
그녀는 물끄러미 자신의 핸드백에 매달린 인형들을 마치 자기 것이 아니라는 듯 한참을 응시하더니.
이라고 짧게 내뱉었어요. 적잖이 놀랬어요. 요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방에 매달린 인형들에 그런 사연이 부여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심지어 그 친구들이 암컷인지 수컷인지도 몰랐거든요.
나는 내가 만난 남자들을 매달고 살아.
라고 그녀가 한번 더 친절히 알려주었어요.
미련이 많은 타입인가? 아니면 미련을 두는 타입?
그녀는 내 질문은 듣는 둥 마는 둥 여전히 인형을 바로 보더니,
오늘이 며칠이지?
휴대폰 속 날짜를 확인해 알려주었어요. 12월 27일.
얼마 남지 않았네.라고 그녀가 혼잣말처럼 내뱉었어요.
뭐가? 또 궁금해서 묻자,
전부 불태울 거야. 새해가 밝으면.
이제 호기심은 수증기를 내뱉은 증기기관차처럼 들썩이고 말았어요.
왜 불태워?
새롭게 시작해야 하니까.
저는 상상해 보았어요. 보신각에서 10초 카운트 다운이 끝에 달하고 달력이 2023에서 2024로 넘어가는 순간 가방에 주렁주렁 매달린 인형들을 떼어내 불타는 화로대에 집어넣고 장작의 희생양으로 소멸되는 장면을요. 인형들이 타오르고 결국, 재가 되어버리는.
지금까지 몇 개를 불태웠어?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 10개?
와... 저는 입을 다물수가 없었어요. 그 수가 꽤나 많았거든요. 부끄럽지만(이게 왜 부끄러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제 연애 경험은 여섯 번이 전부였거든요. 물론, 그 기한이 한 달부터 이 년까지 들쭉날쭉했지만요.
나에게 상처를 준 남자들이야. 물론, 개중에는 정말 연얘라고 명명할 수 있는 걸 한 상대도 있고 아닌 상대도 있고.
아닌 상대는 뭐야?
연애는 분명 아니지만, 아주 가끔 정해진 스케줄을 멈춰 세우고 상대는 나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나는 상대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경우가 있어.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지 몰라도 한 발짝 두 발짝 내딛다 보면 좋든 싫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썸인가?
아니.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어요.
그 단어는 너무 가벼워. 우린, 확실히 어떠한 교감을 나눴으니까. 길게 가진 못했지만.
그 사람이랑은 잘 안 된 거야?
더 나아갈 수 없었어.
왜?
계속 가봤자 뻔한 관계가 되어버릴 테니까. 지루해져 버릴 거야.
조금 어려운데?
나는 정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이 너에게 상처를 준 건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를 판단했어.
판단?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저 보이는 이미지로, 다른 사람이 추측한 허무맹랑한 이미지로 나를 판단했어.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상관없어. 내 알빠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떻든 상처를 받아. 꽤나 아프게.
저는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어본 것만 같았어요. 너는 이러이러할 거 같다. 너는 저러저러할 거 같다.라는 내 얘기에 상대방은 꽤나 실망했어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나는 과격하지 않아.라고 말해주었거든요. 그녀는 기분 나빠 보였고 나는 어떻게든 해명할 필요가 있었어요. 솔직히 조금 당황했어요. 우선, 내가 그런 말을 은연중에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고, 두 번째는 그녀가 상처를 받을 줄 몰랐거든요.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 양이 작았어요. 뭐가 됐든, 반성했어요.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요. 작은 오해를 푸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마, 소주 두 병 정도의.
그런데, 어느 날은 그녀가 나를 판단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은연중에 했던 말들처럼 그녀도 의도하고 한 건 아닌 거 같았어요. 나, 그 정도 찌질이는 아니야.라고 정정해 주어야 했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저 아이러니하네. 하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결국, 관계란 사랑을 바라면서도 동시에 상처를 주는 게 패키지로 붙어 있는 거 같았으니까요. 오히려 중요한 건 누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의 문제보다 오해가 생기면 풀고(몇 병의 초록병이 필요하더라도) 남들이 모르는 우리만의 작은 반전들을 만들어 가는 게 훨씬 재밌지 않을까? 했던 거예요. 그렇잖아요, 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 사람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된 거 아니에요? 물론, 이 과정을 위해서는 오해라는 게 필수적으로 필요하겠지만요.
오해는 풀면 되잖아?
제가 그렇게 말하자,
너 바보야?
여자가 저를 매섭게 쳐다보며 말했어요.
그럴 거면 친구를 했지, 연애를 하지는 않아.
그럼, 너는 그 사람한테 상처를 안 줬어?
나는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통 혼자 오버하고, 혼자 떠들고, 혼자 눈물을 짜다가 끝이 나버리니까. 그럼, 나는 그냥 들으면서 생각해. 음, 이 관계도 끝이 났구나. 하고.
너, 못됐구나.
제 감정이 격양됐어요. 저를 떠난 여자도 그랬을 거 같아서요.
너야 말로 이기적인 거 아니야? 너는 상대방을 판단 안 한다고 생각해? 매 순간이 판단이잖아.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뭔지 알아? MBTI야. MBTI는 그렇게 맹신하면서 자신에게 향하는 잣대에는 그렇게 엄격하다니. 애야? 너만 투정 부릴 줄 알아? 그냥 네가 상처받기 싫었던 거잖아. 저, 인형들 그 남자들이 너한테 준 거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번에,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어요.
네가 상처를 받은 게 아니라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그리고, 그걸 하나의 의식처럼 태워버리고 그 대가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받는 거고.
그녀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맞아. 너무 착해서 아프기도, 너무 안쓰러워서 아프기도, 상대방의 마음에 비해 내가 아무렇지 않아서 아프기도 했던 거야. 상대가 떠날 때도 별로 슬프지 않아서 아프고. 하지만 그들은 나를 사랑해 줬어. 그게 무엇보다 슬퍼. 사람은 가고 물건만 남은 거지.
그리고, 그걸 간직하고 있다가 12월 31일에 태우는 거고?
맞아. 1월 1일이 되면 다시 시작하는 거야. 리셋인 거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의 말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였어요. 우리 테이블 위에는 출처모를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알 수 없는 화가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고요.
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어요. 더 있다가는 토를 할 것만 같았거든요.
새벽 다섯 시, 취기에 휩싸여 술도 깰 겸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어요. 가는 길에 떡하니 위치한 오락실 가게 앞에서 뚝. 하고 걸음을 멈춰 세웠어요. 정문에는 커다란 인형 뽑기 기계가 있었고 단단한 유리창 안에는 가지각색의 인형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어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어요.
나에게 상처를 줬던, 동시에 내가 상처를 준 그녀들이 떠올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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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라이터스짐에서 관원을 모집 중입니다. 우리 같이 글근육을 키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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