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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직남 Jan 07. 2024

검정달력

단편소설집

남자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한 달 동안의 제주도로의 여행은(그는 주변 모두에게 자신이 제주도로 떠나 있을 것임을 공공연히 선포했다. 꽤나 비장하게) 솔직히 즐겁지 않았다. 성인 한 명만 겨우 누울 정도의 복도와 양 옆으로 설치된 이층 침대에 가득 찬 네 명의 남자, 새벽마다 윙윙거리는 모기, 싸구려 모텔 침대처럼 낑낑거리는 베드. 이는 그가 진에어 비행기가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고서 울려 퍼지던, 


환영합니다. 환상의 점 제주입니다.  


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심지어 그는 온 지 3일 만에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목이 따끔하고, 콧물이 쏟아지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친구가 부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이미 그는 부산으로 돌아가는 진에어에 탑승해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그는 기장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환장의 섬 제주였습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건 제주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였다는 걸. 쏟아지는 빗줄기가 상공을 가르고 있는 비행기 날개를 연신 때리는 사이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한 감정, 목표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  한 달이라는 휴가는 어느새 그에게 시한폭탄으로 다가와 있었다. 편의상 휴가지 사실, 그가 자신의 꿈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사장님께,  


한 달 동안 휴가를 다녀오겠습니다. 


라며 그 이유를 빨간 달력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사장은.  


난처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하게. 대신, 솔직한 이유는 알려주게.  


남자는 한참을 머뭇대다 대답해야 했다.  


글을 완성하고 싶어서요. 

글? 자네 글을 썼었나?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년도에 꼭 마무리 짓고 싶은 글이 있습니다. 그것만 하고 오면 이제 미련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런 이유라면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하고 오게.  


사장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현실과 이상. 도전과 불안함. 그는 그 시소 중간에 위치해 바쁘게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그 무게를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 분주함을 줄이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야만 했다. 당연히, 휴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애초에 제주도 여행은, 그것도 쉐어하우스는 이런 상황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째깍째깍. 어떻게 공항을 통과했는지 모를 시한폭탄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다이너마이트에 벨트처럼 둘러 쳐진 타이머는 확실히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남자는 그 폭탄을 이 높은 상공에서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떼어낼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귀를 막고 째깍이는 소리를 작게 차단하는 것. 그리고, 손에도 잘 잡히지 않을 만큼 작은 밥풀에 글자를 새겨 넣듯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곧장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여행가방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스파게티를 만들고 와인글라스를 꺼내 레드와인을 따랐다. 비로소 그를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달력을 보자 휴가는 아직 23일이 남아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시뻘건 색으로 도배되어 있던 12월은. 


어느새, 원래의 검정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

현재 라이터스짐에서 관원을 모집 중입니다. 우리 같이 글근육을 키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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