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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인셋 Apr 27. 2023

이제 작가놀이는 끝이에요

아직도 모르는 나


나에겐 한 달의 유예기간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아까운, 뭔가 집중해서 하기에는 마뜩잖은 시간. 시간이 생김과 동시에 불안하고 조급해서 멋대로 냅다 달리려다 삐끗했다. 내가 움직이는 형태는 늘 가만히 생각만 하다가 갑자기 '빨리, 많이'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출발하면서 삐그덕대는 경우가 많다. 이상한 아드레날린이 솟나.


충분히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이 너무 많아서 움직이질 못하거나, 결정을 못 내린 채로 무턱대고 움직여보자는 이유없는 자신감이 가끔 생겨난다. 그럴 땐 무슨 정신으로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난 남들 앞에선 손을 벌벌 떠는 사람, 대본이 완벽히 외워져있지 않으면 토씨 하나 못 꺼내는 사람이다. 속과는 다르게 남들에게 대범해 보이는 그 자신감의 실체는 실은 내 사지로 피가 흐르지 않는 것 같은 각성 상태다. 입과 뇌가 따로 놀고 있다. 그것은 정말 마약과 비슷한 종류의 것일까. 점점 중독되는 것 같고, 죽도록 싫은데 발생빈도도 높아만 간다. 될 대로 되라니. 낯선 넌..누구냐.


그것은 마약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학습이다. 대체로는 95퍼센트의 대본을 가진 나는 일이 삐끗하면 극도의 예민함을 보이지만, 차라리 대차게 엎어진다면 모든 걸 원점부터 되돌아 볼 수도 있는 넉넉함을 선보인다. 사실은 그런 완벽한 대본 없이도 삶은 잘 굴러간다는 걸 학습한 것이다. 되려 내 계산에 없는 것이 훨씬 나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해 보기 전엔 알 수 없다. 내 힘으로 통제하지 못할 것이 두려워 최악의 최악을 늘 가정하며 피곤하게 살고 또 계획을 하지만, 때로는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가두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 문을 열어두려 한다. 그 문을 여는 걸 그렇게나 어려워 하는 사람이 많다. 오래 불안해서든, 갑자기 당황스런 상황이든 스트레스를 느끼기는 똑같다. 사실은 실수가 두려운 것이다.






이 곳에서 작가라고 주어지는 이름은 물론 조금 좋았지만 어디서든 그 이름은 무겁고 과분하다. 나에겐 그렇다. 글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를 작가라는 건 모름지기 삶에도 조금쯤 통달해야 할 것 같은, 비뚫어지지 않은 시선의, 운치를 가진 자여야만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적당히 배우다가 이제 좀 알겠다 싶을 때 일을 멈춰야 했고, 내내 배운 것도 아닌 무엇이 될 지 모를 생업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나, 결혼과 육아에 전념한 몇 년을 딱히 희생이라고 표현하지도, 헛되거나 억울하다 표현하지도 않으려 한다. 그 간 나는 사회초년생의 지친 마음을 잘 달래 여유를 즐기며 쉬었고, 아이에겐 중요했을 이 때라도 집중해서 품고 돌본 것과 내가 원하는 가정의 가치와 규칙을 시간을 들여 만든 것에 보람을 느낀다. 우리는 이미 안에서 탄탄하니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계획대로만 흘러갈까. 경력이 끊겨버려 더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조금 헛헛하지만 더 나은 것이 기다릴지도, 이 경력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른다. 몇 번의 퇴사에서 이미 경험했다. 모든 시간은 결국 언젠가는 쓸모가 있게 된다. 조금 돌아서 가고 있을 뿐이다.


백일의 글쓰기는 실로 효과가 있어서, 지지부진하던 내 글쓰기도 조금은 표현의 범주를 넓혀가고, 읽는 입장이란 걸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곳에 쓰인 글은 많이 읽히고 싶은 욕심도 나지만,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님을 잊지 않으려 한다. 써 본 후에야 알았다. 내 속에 있는 건 나도 모를 때가 있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주제였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가거나, 이게 뭐 글이 되나..했던 것이 시작하면 두세 편도 써지곤 하는 경험을 했다. 글도 결국은 뜻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 의도대로, 의도치 않은 것도 쏟아내어서 그만큼 쓸 것은 조금 고갈되었나. 더 배우고 쌓아야 또 쏟아낼 것이 생길 모양이다. 써보고 싶은 건 아직도 많지만 추리고 정돈해야 읽힐만한 모양새가 될 것 같다. 아직 작가는 아닌 것 같은 나지만, 그래도 쓰는 내내 즐거웠다. 많이 비우고 배웠다.


더 많이 읽고, 경험하고, 할 말이 쌓이거든 가끔 잊지말고 적도록 해야겠다. 조금이나마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께도 은둔자와 같은 지금의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으므로 깊이 감사드린다.


이제, 작가놀이는 끝이에요.


('놀이'는 가벼워서 놀이가 아니다. 작가란 한없이 무거워서 아직 내가 하는 건 고작 흉내낸 '놀이'만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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