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갈게요, 근데 왜 꼭 그런 게 업이 되고 마는지
학부생이던 시절, 이제 고학년이 되었으니 진짜 진지하게 공부해야겠다 마음먹고 수강신청 후 첫 면역학 수업에 들어갔었다. 면역학이라는 학문만큼이나 깐깐하기로 소문난 실력 있는 교수님. 첫인사부터가 대뜸 협박으로 시작되었다. 점수 후하게 줄 생각은 없으니, 이 어려운 공부를 진지하게 피 터지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중 띄게 학점 채우러 온 거라면 나가라고. 첫 대면에 겁을 주는 교수님은 많았지만 그렇게 온화한 얼굴로 냉정하게 말씀하시니 장난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렇잖아도 그 복잡한 시그널들 속 화살표, 대중도 없는 방향과 분자들의 모양, 전문용어라도 단어이기나 하면 입에 언젠간 붙을 텐데 영 알 수 없는 알파벳과 숫자로만 이뤄진 이름들로 빽빽한 그 도식들을 어깨너머로 봐 온 나는, 겁에 질려 그렇게 시간표를 정정하고 만다.
나는 면역학을 배우지 않았다.
(필수 과목은 아니었기 때문.)
그리고 면역진단을 업으로 삼게 된다.
('업'이라는 말이 가끔은 이래서 '일'이 아닌, '업보'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얘한테 뭘 잘못했을까, 정말.. 좋은데 미치고 팔딱 뛰게 하는, 애증의 업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흘러서 일이 되었으나, 나에겐 결국 필수로 배웠어야 할 과목을 못 배운 셈이 되어서 일을 하며 실험원리를 파악하는 데에만 꽤나 많은 시간을 따로 할애해야 했고, 독학에는 아무래도 조금의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진단만 할 때에는 실험하는 손이 더 중요하고, 항원-항체, 단백질에 대해서만 좀 알아도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 영역을 넘어서자 웅덩이에 연결된 바다가 펼쳐졌다.
바이러스, 전염병과 감염증, 백신, 항원과 항체.
면역학의 첫 챕터에 반드시 나오는 것들이다.
내 일은 그것이니, 앞쪽만 봐도 어찌 되지 않으려나?
(물론 대학원 가서 다시 배웠다, 쓸 만큼은.)
나는 수면에 평행하게, 그렇게 마주 볼 자신은 없어 두 눈을 질끈 감고 등으로 철썩, 바다를 맞이했다. 또 지겨운 박치기다. 아팠다. 그리고 조금씩, 그 아래로 침잠했다.
면역,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 많은 죽음 후 추측과 가설들로 만들어진 학문.
수많은 세포와 분자들이 상황에 따라 분화하고 변하여 한 방향만으로도 아닌 신호를 전달, 전달, 증폭하고 없애고 off. 그렇게 얼기설기 그물망처럼 연결된, 이쪽저쪽으로 주고받으면서 정교하게 작동되는 커다란 시스템. 그 촘촘함 속 고도의 특이적 기억으로 컴퓨터처럼 정확하게 작동하지만 때로 붙였다 떼었다 하는 간단한 조작과 계속된 전달의 고장으로 '나'를 구분하지 못해 생기고 마는 문제들.
뒤늦게 필드에 가서야 배운 면역학은 유기적 시스템을 똑똑 분절시켜 배우게 하는 것이 (책으로 배워서 그런가..), 뚝뚝 끊어놓아 맥락 없는 어릴 적 교과목 위주의 공부나 다를 게 없었다. 초보자이니 하나하나도 다 기본을 알아야 하지만, 한 권을 다 들여다 보아도 왠지 상황마다의 전체 '시스템'이란 건 머릿속에 그다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공부가 부족한 탓이리라.
약물과 독성학의 측면에서는 작용 기전 상의 어느 관문이 작용하고 억제되는지, 실험 후 결과에서 명확하게 두 가지로 그려지는 기호가 존재한다. 그게 좀 부럽다고 생각했다. 가설의 시작부터 그 도식으로 시작해, 피드백의 작용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로 명쾌하게 결정되는 것이. 하지만 면역을 획득하는 것은 그런 정해진 답이 없었다.
면역학의 시작처럼 늘 가설이고, 가능성을 확인했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 복잡한 그물 속에서 명확한 원인을 찾을 수도, 매 단계마다 개인의 너무 큰 편차와 영향을 주는 수많은 요인들을 다 소거해 버릴 수도 없다. 경향성을 볼 뿐이고, 그래서 가끔 안갯속의 과학 같다. 과학인데 안개라니. 이토록 불명확하니 역시 핑계대기 딱 좋은 게 면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걸 왜 붙잡고 있는지..
(아마도 '목적'만은 너무도 분명한 학문, 그 '목적' 때문에 놓을 수 없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