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거림
가끔 생각한다. 내가 아직도 너를 만나기 전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 그런 기준이 남아 있나, 스스로를 테스트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금방 알게 된다. 아니다. 너는 나를 많이 바꿔놨고, 네가 떠난 자리의 공백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바꿨다. 그리고 그 변화들은, 다시 나를 일정 부분 예전으로도 되돌렸다. 나는 타인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쫓기보다는, 내 마음을 먼저 주는 쪽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너는 나에게 많은 걸 줬고, 나는 네가 준 것들로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좋든 나쁘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외모를 본다. 객관적으로 잘생겼어도 반듯하지 않으면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런 취향이 너와 연결돼 있다는 걸 안다. 너의 눈빛, 단정했던 옷차림,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 나중엔 너와 함께 꼬질꼬질해진 시간까지. 우리는 그런 편안함을 좋아했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집에서 너무 편해지는 연애는 싫다고. 그럴 때면, 코를 파던 네 모습조차 귀엽다고 느꼈던 내 마음이 떠오른다. 나는 너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 했고, 너는 민낯이 더 좋다 했다. 그런 유치하고 사소하지만, 가장 직관적인 말들이 자꾸 떠오른다. 짜증 나게도. 그렇게 나를 좋아해 놓고, 왜 더 감당하지 못했냐. 약하디 약한 네가 원망스럽다. 나는 비혼주의자였고, 아이도 좋아하지 않았다. 알레르기 때문에 강아지도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네 앞에서는 약 먹고 키울 거라고 우겼고, 심지어 네 친구 앞에서도 “너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라고 철부지처럼 주절주절 거렸는데. 억울하다. 씨.
너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이길 바랐다. 그런데 네가 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억울했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했던 것 같다. 너와 끝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끝이 온다면 나도 다른 사람과 가볍게 만나보자는 다짐을 했다. 그래야 네게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됐다. 더 심해졌다.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것도, 입을 맞추는 것도 상상되지 않았다. 그게 네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술에 취해도 안 됐다. 울렁거렸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겁은 아니었다. 감각 자체가 없었고, 거절이라 하기엔 명확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를 원한다고 착각했지만, 정확히는 아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나다. 너를 만나기 전과 후는 분명히 나뉘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지만 한 가지는 예전과 똑같다. 아무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 아무도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그러면서 너의 의미에 압도당하는 것. 모든 게 잠겨 있다. 너와 끝났다고 믿었고, 끝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게 다짐만으로 정말 마침표가 찍히는 게 아니라는 게 잔인하다.
관계는 끝났지만, 어떤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고통이라 하기엔 무디고, 사랑이라 부르기엔 오래됐다. 그냥 정지된 상태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관찰한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지’, ‘건강한 연애를 해야지’ 같은 생각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비교는 끝났다. 누가 누가 더 나은가가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예전의 나는 너의 다정함에 흔들렸고 기대했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착해도, 다정해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다. 나는 너무 멈춰 있고, 어디로도 나아갈 생각이 없다. 다시 꺼낼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이 상태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나 자신에게조차 확신이 없다. 그래도 영원한 소멸은 아니길, 잠시 소진된 거였으면 좋겠다.
연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남녀가 만나다 헤어지는 건 당연하다. 근데 나는 너무 촌스러운 사람이니까. 50년 전에 태어났어야 했나. 아, 그때도 이 정도로 구질구질하진 않았으려나. 너무나 간단해지는 사람들 속에서 내가 더 눈에 띄는 게 부끄럽다. 그래. 솔직히 네가 뭘 얼마나 해줬다고, 내 사랑을 그렇게 듬뿍 받고, 이렇게 끝나고 나서도 너란 존재로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나 괜찮다. 일상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고통스럽진 않으니까. 그냥 텅 빈 것 같다. 사실, 진짜 나는 죽은 것 같다. 아니, 죽은 게 맞다. 진짜 나를 보여주던 유일한 사람이 없어졌으니. 별일 없이 지나가는 사소한 일상들을 버텨가면 되겠지. 근데 앞으로 그렇게 채워질 내 삶에 네가 전혀 없다는 게 서럽다. 허무하다.
어차피 다 죽는데, 오래 살아봤자 70년 더 사는 건데. 그렇게까지 내 말 하나하나에 아파하지 말지. 너. 좀 그냥 사랑하지 그랬냐. 그래도 지금은 좀 편했으면 좋겠다. 잘 살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