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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

by 기묘염

감기기운이 있을 때면, 따끈한 국에 밥 한그릇을 좀 많다 싶을 정도로 양껏 먹고 평소보다 다소 이른 시간에 잠을 푸욱 자야한다고 배웠다. 이제는 감기 기운이 있다고해서 다른 모든 일을 그저 미뤄두고 몸만 일으켜 숟가락만 들면 차려져 있는 밥상 같은 건 없다. 진통제가 섞인 감기약을 먹고 다소 붕 뜬 것 같은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고, 아침밥은 건너뛰고 점심 저녁은 밖에서 먹는다. 그래도 아플땐 많이 먹어야 하는 습관대로 짜장면을 한그릇 때려박고 와서 밤에 테라플루를 한 컵 마신 후 오밤중에 오렌지를 까먹었다. 배가부르니 자정이 넘어도 누울 수가 없다. 감기보다는 만성적인 위장병이 더 무서운 나이가 되었다. 이제 양껏 먹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육체적 딜레마가 서럽다.

벚꽃을 보러 가겠다고 차를 한시간 운전해서 교외로 나갔다. 흐드러지는 벚꽃길을 드라이브하고, 꽃길을 걷고, 바다를 보며 밥을 먹고 차를 마셔야지 했는데 예상과 달리 꽃이 하나도 없었다. 괜히 연가썼다며 투덜대고, 꽃이 피지 않은 나무 아래를 걷고, 아무 풍경 없는 삭막한 맛집에서 밥을 먹고, 섬으로 가려진 시야좁은 바다를 보며 차를 마셨다. 어쨌든 시간은 가니까. 꽃을 함께 보고 싶었던 사람과 꽃은 못봤지만 볼 것이 없으니 서로를 바라보며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내가 사는 도시로 돌아와 친구를 내려주고 집에 혼자 운전해서 가는 그 길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이 길이 이랬었나. 꽃을 아쉬워하고서야 꽃이 보였다. 늘 운전해 다니던 그 길에 보란듯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세계는 내가 보고자 하는 것들로만 구성되는 개별적인 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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