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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지만 늦은 기록

by 기묘염

뭔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시간동안 열심히 다 쓴 글을 날려버렸다. 순간적인 분노 끝에 정수리가 간지러운 것이 흰머리가 몇 개 더 돋아난 거 같다. 나이가 들어서 흰머리가 나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바보같은 짓들로 날려버린 모든 것들이 흰머리로 응축되어 하나씩 돋아나는 걸지도 모른다.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 날려버린 것들을 떠올리라고. 인생의 모든 바보같은 짓거리들과 놓쳐버린 것들 고의적으로 버린 것들 의도치않게 잃어버린 것들을 아쉬워하라고.

머털도사처럼 흰머리를 하나 뽑아 날리면 날려버린 것들이 휘리릭 되살아나 눈앞에 구현되면 좋겠다. 그러면 시발 더아쉽겠지?!!!


기록을 위한 일기이니 늦었지만 탄핵 재판에 관한 소감을 쓰고 있었다. 나는 법대생이었다. 다니는 도중에 학교에 로스쿨이 생기는 바람에 사라져버린 학과의 마지막 학부생이 됐지만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학교다니는 내내 법에 대해 품은 호기심이란 이런 것 뿐이다. 어차피 지들끼리만 알아들을 걸 결과만 알려주지 왜 판결문은 다 읽고 ㅈㄹ이람. 사실 풀어쓰면 별것도 아닌 말을 뭔 사대조선이라고 한자로 소통하고 자빠졌나. 의사가 영어로 씨불이고 차트쓰는거랑 비슷한건가? 용어를 통한 차별화. 정보의 격차로 만들어내는 의도적인 권력. 권위의식과 우월을 확보하기 위한 엄숙한 암호?

헌재의 탄핵판결문 낭독을 듣고 충격받았다. 알아듣게 쓸 수 있는데 그동안 안썼던 거였구만!

문학적따뜻함. 공감. 유머감각은 검색대에 맡겨둬야 출입 가능한 곳이 법원인줄 알았는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 친절한 판결문이, 오직 언어의 치밀함과 논리와 지성만으로 스스로 권위와 존경을 부르는 명문이였다. 학부생일때 저런 판결문으로 배웠더라면 일학년 일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법에서 그토록 진저리를 치진 않았을텐데! 내 학점도 그보단 나았겠지... ㄱ라고 뒤늦게 통탄을 좀 해보았다.


그 역사적인 판결의 날, 회사에 모두 모여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한사람의 낭독에만 귀 기울였다. 한 문단이 끝나자마자 아 인용이구나 싶었지만 문장들이 좋아서 말을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모든 낭독이 끝나고 마지막 주문! 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모두가 함께 느꼈다. 엇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나이라서 그렇다.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생각을 공유하고 비슷한 예측과 비슷한 결과만을 반기다보니 마치 그것만이 세상 모두의 의견인 것처럼 거리낌없이 기뻐했다(물론 다수의 의견이였다고 확신한다). 이날은 내 인생을 통틀어 내가 목격한 시대의 역사적인 장면중 탑파이브 안에 드는 장면이라 확신한다. 사실 그래야만한다. 이게 탑5에서 밀려나기 위해선 전쟁, 학살, 통일 , 자연적대재앙 , 경제붕괴,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게 없다. 아직은탑3니께 (1.계엄,2탄핵(윤),3.탄핵(박)) 통일이라든지 트럼프탄핵이라든지 뭐 그럭저럭 두고보기 괜찮을 일을 위해 남은 두자리는 아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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